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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하고 사랑스런 소동을 담은 로맨틱코미디, <오만과 편견>
오정연 2006-03-21

연애는 전쟁이고, 결혼은 비즈니스다. 그것은 두개의 세계가 만나 상대와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부유하고 잘생겼지만 성격에 문제가 있는 남자와 예쁘거나 총명하지만 집안은 가난한 여자는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결혼을 고민하고, 그로 인해 얻게 될 이득과 버려야 할 것을 고려하여 선택을 내린다. 영국의 시골 마을에서 평생을 노처녀로 살았던 제인 오스틴은 그러한 상황을 본능적으로 파악한 작가였다. 제인 오스틴이 21살에 완성했던 장편을 개작한 소설 <오만과 편견>은 우리가 사랑 앞에 정정당당할 수 없도록 만드는 두 가지의 나쁜 버릇이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지를 밝히고, 전쟁과 비즈니스를 좀더 바람직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공들여 고민했다. 그로부터 200여년 뒤. 사랑과 결혼의 달콤함과 비정함을 함께 담는 데 탁월한 능력을 선보였던 워킹 타이틀은, 로맨틱코미디물의 원형으로 남아 있는 원작의 숨결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는 만만찮은 과제를 보란 듯이 성공시킨다.

좋은 혼처를 만나지 못하면 여생을 보장받을 길 없는 다섯 자매 중 둘째인 엘리자베스(키라 나이틀리)는 사려 깊고 솔직하다. 남부러울 것 없는 사회적 지위와 재산을 지닌 다아시(매튜 맥파든)는 허영으로 가득 찬 사교계 여성 속에서 빛나는 상대를 알아보는 안목을 지녔다. 그러나 다아시는 타인에게 자신을 설명하는 능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자신의 판단을 좀처럼 굽히지 않는 엘리자베스는 오만한 다아시를 미워하기로 한 애초의 결정을 바꾸지 않는다. 화해가 쉽지 않아 보이는 캐릭터의 갈등은 필연적이고,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호감은 오직 본인들만 모르는 익숙한 상황. 한편 다아시의 친구인 빙리(사이먼 우즈)와 엘리자베스의 언니인 제인(로자문드 파이크)은 서로를 향한 진심에도 불구하고 온갖 오해와 방해로 이어지지 못하는 안타까운 커플이다. 외모와 집안 모두 내세울 것 없는 엘리자베스의 친구 샬롯은 인간적으로 도무지 정이 가지 않는 이를 자신의 배우자로 받아들인 뒤 행복해하고, 엘리자베스의 동생 리디아(제나 말론)는 사기꾼과 야반도주 끝에 모든 가족에게 피해를 입히며 결혼에 성공하고도 반성의 기색이 없다.

두 주인공을 포함한 모든 인물들의 캐스팅은 더이상 완벽할 수 없는 조화를 보여준다. 키라 나이틀리와 매튜 맥파든은 원작보다도 설득력있는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모습을 선보이는데, 놀라운 것은 이들이 연기한 캐릭터가 특별히 현대적으로 변형된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두 사람의 관계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주변 인물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엘리자베스를 제외한 딸들에겐 심드렁한 무관심과 묘한 무시로 일관하는 아버지(도널드 서덜런드), 남자들의 관심을 받고 싶지만 다른 자매들처럼 노골적으로 이를 표현하고 싶지는 않은 키티(캐리 멀리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나름의 해결책을 찾는 현실적인 샬롯 등은 소설처럼 상세하게 설명되지 않지만, 짧은 순간 각자의 세계관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제인 오스틴은 직업을 선택하거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없는 여성들이 자신을 부양할 남편을 만나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아야 했던 동시대를 유머러스하고 신랄한 문체로 조소했다. 비주얼적 묘사가 서사의 방식으로 자리잡기 전 완성된 문체를 그대로 영화화할 수 없음을 인지한 제작진은, 대부분의 사건과 중요한 대사를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전체적인 분위기에는 과감한 변형을 감행했다. 이는 자연환경을 비롯한 일상과 교양, 즉 당시를 살아갔던 이들의 모든 문화를 최대한 영화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언제나 제인 오스틴이 배경으로 택했던, 아늑하면서도 때로 광활하게 다가오는 영국 시골의 풍경은 영화 속에서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한다. 매번 사랑스럽지만은 않은 자연의 풍경은 인물의 내면을 설명하는 충실한 어휘가 되어주는데, 한 평론가는 이에 대해 “제인 오스틴을 에밀리 브론테와 헷갈린 것 아니냐”며 볼멘소리를 늘어놓을 정도다.

카메라가 실내로 들어오면 영화적 화법을 위한 제작진의 시도는 한결 섬세해진다. 하층 귀족인 엘리자베스의 집과 다아시를 비롯한 명문 귀족들의 집을 효과적으로 대비시킨 것이 미술이라면, 공들여 세팅한 실내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니며 전형적인 인물들의 복잡미묘한 관계를 포착한 것은 촬영의 힘으로, 원작의 수다스러운 문체를 대신한다. 시골 귀족들의 순수함과 허영이 뒤섞인 무도회 장면은, <순수의 시대> 등 으리으리한 시대극 속 매끈한 스테디캠의 담백한 버전이라 볼 수 있다. 엘리자베스가 시종일관 다아시를 의식하면서도 자신이 마음에 두고 있던 남자를 찾아다니는 동안, 엘리자베스의 어머니(브렌다 블리신)를 비롯한 그의 모든 가족들은 각자의 속물근성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모든 등장인물이 지닌 저마다의 감정을 한 호흡으로 보여주는 이 장면은 수십명에 달하는 남녀가 참여한 군무를 배경으로 한다. 손을 맞잡았다가 반대편으로 스쳐가고, 다시 눈빛을 맞추며 자리를 바꾸는 일련의 과정은, 서로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한껏 촉수를 세운 남녀의 대화와 맞물려 터질 듯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여기에 효과적으로 편곡된 바로크 춤곡이 스릴을 더하는데, 일찍이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했던 무도회 문화의 에로틱함까지 느껴질 정도다.

질펀한 진흙과 자욱한 안개와 거친 비바람 속에서 혹은 노골적인 계급차별과 인격모독이 난무하는 가운데 행복해지고자 안간힘을 쓰는 이들의 소동을 담은 <오만과 편견>은 소박하고 사랑스럽다. 한 사람이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난 사랑에 빠지고 우여곡절 끝에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는 지극히 사적이고 은밀한 사건이 보편성을 획득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기분좋은 마법이다. 그저 보고만 있어도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더욱 기분 좋은 것은 이 사소한 마법이, 연애와 결혼 그 자체를 인류학과 사회학의 화두로 승화시키는 저력을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 온실 속 화초들의 순진무구한 연애담이 아니었듯, <오만과 편견>은 로맨틱코미디라는 장르가 특정한 세계를 담을 만한 그릇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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