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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의도가 결함을 메워주진 않는다, <박치기!>

황진미의 <박치기!> 반론에 대한 남다은의 재반론

두편의 글이 있었다. 한편은 <박치기!>에 대한 나의 견해를 반박하는 글(542호 황진미의 반론)이었고, 다른 한편은 내 글이 싫다는, 다소 소심한 수사였다. 내가 여기서 염두에 두는 건 황진미가 전개한, 나의 글에 대한 반론이다. 그러나 나는 잠시 이 글의 게재여부를 두고 망설였다. 황진미와 나의 견해는 애초 그 시작점이 다르기 때문에 그녀의 글에 대한 재반론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 의문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진미의 논지를 바탕으로 하되, 이전 글에서는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조금 더 첨가하고자 한다. 그 편이 차라리, 생산적일 듯하다.

개인사와 사회사를 혼돈하지 말라

황진미의 논지의 함정은 개인사와 사회사의 관계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데 있다. 그러니까 그 둘은 너무도 쉽게 자리바꿈을 한다. 그건 이 영화의 함정이기도 하다. 영화 속 사적 관계의 변화가 곧 사회적 관계의 변화를 야기할 것이라는 전제. 물론, 역사는 인간 개개인의 삶과 분리된 추상적인 무엇이 아니며, 그 둘은 언제나 함께 간다. 그러나 사적 관계에서 화합이 이루어졌다고 반목과 상처의 역사에 평화가 오는 것은 아니다. 개인들의 관계가 새로운 역사의 시작에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그 둘 사이에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존재한다고 볼 수는 없다. 사적인 화해 혹은 관계의 정치성은 그것이 공적 층위와 대립되는 ‘사적’ 차원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보다, 그 화해가 어떠한 맥락에서 시작되어 어떻게 공/사의 담론을 가로지르는지의 가능성을 살펴볼 때 드러난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재일조선인과 일본인의 로맨스는 분명, 역사적으로는 불가능했던 성취이지만, 그건 그저 개인적 차원에 그친 성취다. 나는 그처럼 개인적인 차원의 화해 혹은 살아남는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영화가 이 개인들 각각을 조선과 일본으로, 이들의 관계를 조선과 일본의 관계로 너무도 쉽게 환유할 때 발생한다. 이를테면, ‘조센진’과 ‘쪽발이’의 로맨스는 조선과 일본의 화합의 시작을 알린다와 같은 암시.

사실, <임진강>의 경우에도 그 노래가 고우스케의 사랑의 세레나데로, 다시 말해, 거국의 노래가 한낮 사적인 노래로 변한 것에 대해 굳이 변질이라고 표현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고우스케의 <임진강>이 더이상 ‘북조선의 <임진강>’은 아닐지라도 그것을 곧 <임진강>의 타락이라고 단정하고 싶지도 않다. 그때의 <임진강>은 그저 다른 맥락에서 소년의 감수성을 건드린 다른 노래였을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영화가 고우스케의 사적인 <임진강>에 자꾸만 거대 담론을 덧씌우려는 유혹에 빠진다는 것이다. 영화는 금지곡 <임진강>이 일본 라디오 방송에서 일본인에 의해, 일본 가사와 한국 가사로 불리는 그 순간을 재일조선인 1세의 절규 바로 다음에 배치한다. 이러한 배치는 소년의 사랑을 사적 담론에서 보편적인 휴머니즘으로 확장시키는 효과적인 역할을 한다. 이것이 영화가 이 노래에 공적인 정치성을 부여하는 방식이지만, <임진강>이 누구에 의해, 어디서 불리고 있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건, 이 노래가 어떠한 맥락 위에, 왜 존재하는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는 조선 노래가 일본인에 의해 불리는 그 순간, 노래는 보편적인 호소력을 획득할 것이라는 사실에만 초점을 둘 뿐이다. 분단의 고통을 내재한 <임진강>에서 그 고통의 맥락, 그 고통의 과거와 현재를 제거하고, 오직 통합의 미래만을 상상하는 노래. 이것이 <임진강>의 죽음이다. ‘어떻게’에 대한 고민이 없을 때, 경계의 지움은 경계 지음만큼이나 위험하다는 것을 영화는 잊고 있다.

나는 이것이 한 나라의 역사를 얼마나 잘 알고 모르는가에 의해 달라지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본 감독이 재일조선인의 삶을 다루는 데는 어찌 되었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나는 이것이 사적인 역사와 공적인 역사, 영화 속의 역사와 영화 밖의 역사 사이에 보일 듯 말 듯 놓인 경계를 끊임없이 지우고 또 인식함으로써 얼마나 깊은 성찰로 나아갈 수 있는지의 문제라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박치기!>는 내게 그 성찰의 폭을 오가는 재미를 안겨주지 못했던 영화이다. 허문영은 <뮌헨>에 관한 글 서두에 이렇게 썼다. “좋은 의도가 좋은 영화를 만들진 않는다.” 나는 그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좋은 의도가 영화의 결함을 메워주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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