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인기를 끌었던 게이드라마 <퀴어 애즈 포크>의 메인 캐릭터 중 한명이었던 마이클은 열렬한 만화광이어서 나중에 스스로 만화가게의 주인이 되기도 한다. 우연히 대학에서 만화 강의를 하게 된 그는 매우 곤혹스러워하다가 강의를 풀어가기 위한 첫 번째 열쇠로 자신이 왜 코믹북들의 슈퍼 히어로들에 매료됐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그 이유는 묘하게도 자신의 성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었다. 슈퍼 히어로들은 일반인과 비교했을 때 어떤 점에서는 ‘정상’이 아니며, 자신의 정체성을 철저히 숨겨야 한다는 것이 게이로서의 마이클의 정체성과 유사한 점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지난 세기까지 스크린상에서 슈퍼 히어로들인 온갖 ‘∼맨’들은 부러움의 대상이자 완벽함의 대명사였지만 새로운 밀레니엄과 함께 그들의 콤플렉스와 트라우마 등을 조망하면서 히어로들의 인간적인 면들이 강하게 부각하기 시작했다. <브이 포 벤데타>의 V는 바로 이런 현상의 극점에 있는 캐릭터이자 한번도 가면을 벗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가장 강력하게 숨기고 있는 슈퍼 히어로라고 할 수 있다.
때는 2040년의 영국, 3차대전이 끝나고 영국 국민들은 정부의 완벽한 통제 아래 살아가고 있다. 엄격한 통금시간이 존재하고, 현대의 경찰보다 더 강력한 권위를 가진 ‘핑거맨’이라는 집단이 밤의 시간을 지배한다. 거리 곳곳에서 카메라는 국민들을 감시하고, 스피커와 TV 화면은 정부의 폭력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세상은 지나치게 평화롭고 국민들은 그러한 평화를 위해 자신들의 비판적인 사고와 자유를 포기한 상태다. 모두 똑같은 채널을 보고, 조작된 뉴스를 보면서 ‘진실’과 ‘거짓’을 판단할 기회를 박탈당한다. 독재정부의 철저한 감시체제와 그것이 일상화되어 비판력을 상실한 국민이라는 모티브는 조지 오웰의 <1984년>에 나왔던 ‘빅브러더’의 세계를 환기시킨다.
이비(내털리 포트먼)는 어느 날 밤 몰래 길거리로 나섰다가 자신들의 힘을 무기로 그녀의 몸을 요구하는 ‘핑거맨’들에게 둘러싸인다. 꼼짝없이 그들에게 농락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쓴 정체불명의 사나이 V(휴고 위빙)가 나타나 그녀를 구한다. 가이 포크스는 1605년 11월5일, 영국의 제임스 1세 정부의 독재에 항거하기 위해 장작더미 아래 36배럴의 화약을 숨겨 의회 지하터널로 잠입했다가 체포되어 처형된 실존 인물이다. 40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에 가이 포크스의 항거 정신을 되살리고자 하는 V는 그의 형상을 본뜬 가면을 쓰고, 다시 한번 혁명적인 폭파사건을 계획한다. 묘한 인연으로 V의 계획에 휘말리게 된 이비는 V의 사상에 점차 동조하기 시작한다. 반체제 인사를 부모로 둔 덕에 오히려 더 체제순응적인 삶을 살아온 이비는 V의 등장으로 자신의 내면에 숨어 있던 불씨가 댕겨졌음을 느끼게 된다.
V는 독재자인 셔틀러의 강력한 무기이자, 현대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매스 미디어를 공략한다. 그는 TV 화면을 통해 모든 국민에게 평온한 순응 상태에서 깨어날 것을 호소한다. 과거에 가이 포크스가 혼자서 이루려다 실패했던 독재체제의 전복을, V는 모든 국민을 통해 이루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를 추동하는 가장 강력한 힘은 대중에 대한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지배체제에 대한 ‘복수’(Vendetta) 욕구에서 나온다. 그는 기존의 어떤 슈퍼 히어로보다 현란한 말솜씨로 잠들어 있는 대중에게 접근하며, 자신의 언어를 통해 지배층의 거짓에 가려진 진실이 대중에게 밝혀질 수 있다고 믿는다.
가면과 가발 등을 이용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자신을 철저하게 감추고 있는 V는 이비에게 가상체험을 통해 분노라는 감정을 일깨워준다. 이비는 V를 통해 자신이 알고 있던 세상의 틀을 깨고 나가면서 새로운 인물로 탄생한다는 점에서 워쇼스키 형제의 전작 <매트릭스>의 네오의 여성형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네오가 전 인류의 무지를 자신의 십자가에 짊어지고 구원하는 메시아 같은 느낌을 주었다면, 이비는 V의 증오심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건설적인 희망으로 전환될 수 있도록 대중과 그의 존재를 중계해주는 인물이다. 그녀가 머리를 삭발한 것은 스스로 강력한 전사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감각한 대중에서 깨어 있는 시민으로 정신적인 전환을 이루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V는 증오가 불러오는 피의 복수로 상징되는 자신의 시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며, 이비의 시대가 올 것임을 예언한다. 이비의 시대란 체제에 대한 전복을 꿈꾸는 무수한 V들이 광장을 메우고, 그 광장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감춘 가면을 벗고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다양성이 공존하는 시대를 말한다.
<브이 포 벤데타>는 앨런 무어와 데이비드 로이드가 공동 창작한 그래픽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1981년에 연재가 시작되어 1990년 출간된 이 작품은 영국의 ‘대처리즘’(Thatcherism)에 대한 강한 비판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작품을 영화화하면서 워쇼스키 형제는 미국의 패권주의, 이슬람 문화와 동성애자에 대한 과도한 공포 등을 삽입함으로써 현재 세계적 정치 판도에 대한 은유로 전환시켰다. 뿐만 아니라 정치 지도자에 대한 불만을 가진 자들이나, 성적 취향, 정치적 성향이 다른 자들을 ‘정신집중캠프’에 수용한다는 설정은 근간 정치적으로 재조망되고 있는 ‘삼청교육대’ 문제를 상기하는 면이 있어 한국 관객에서 더욱 섬뜩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독재와 언론 통제 등을 가까운 과거에 경험한 우리에게 이 영화는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이 아니라, 떠올리고 싶지 않은 역사에 대한 회상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