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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영화학자가 바라본 스크린쿼터 축소에 대한 우려

산업적 논리로만 따지지 말라

정부의 스크린쿼터 축소 발표 이후 한국 영화계가 그동안 자생적으로 키워온 견고한 그 모든 것이 대기 중으로 사라질지도 모르는 상황에 도달했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언급될 수 있는데 하나는 한국에서 만들어진 영화가 상영되기 어려워진다는 가장 기본적인 산업적 문제들이며, 나머지는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수많은 문화적 딜레마에 대한 사항이다. 물론 전자와 후자는 매우 복잡한 상황과 미묘한 함수관계를 포함하고 있어서 임의적으로 구분하기엔 어려운 지점이 있으며 그 구분짓기마저도 의미없는 행위처럼 보여질 수 있다. 더구나 최근 한국사회가 당면한 경제적 위기라는 단어 앞에서 문화라는 이름은 단순히 몇몇 소수자들의 배부른 소리로 이해될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산업적 논리에 의해 휘발되고 산화되는 문화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 된다.

필자가 우려하는 바가 바로 이 지점이다. 이는 영화의 산업적 측면을 외면하거나 불필요한 요소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 인해 영화의 문화적 측면이 외면되거나 왜곡되고 있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영화의 문화적 요소가 가장 근본적인 텍스트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학자나 평론가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빈약해져버린 문화의 위치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안타까울 뿐이다. 그 안타까움의 첫장은 산업이 현재의 모든 문화적 상황을 결정할 것이라는 기계론적 믿음과 속성에서 기인한다. 최근 너무 자주 듣게 되는 경쟁이라는 의미부터 살펴보자.

한국 영화산업의 성장 진단은 단순 계산법

현재의 스크린쿼터 문제에서 가장 힘있게 작동되는 언표는 그야말로 경쟁(력)이다. 이른바 ‘한국영화의 경쟁력은 예전의 수준을 넘어서 상당한 수준을 확보하고 있다’로부터 ‘한국영화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쿼터제의 축소는 정당한 것이다’라는 등 다양한 곳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사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경쟁은 상대적인 우월성을 획득하기 위해 다투는 것 자체를 의미한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경쟁이라는 의미는 상대의 우월이 나타나는 그 순간 상실된다. 그 이후의 상대적 관점은 경쟁관계 또는 경쟁적 공존이라는 말로 대체된다. 결국 ‘경쟁력이 있다’라는 말은 단순히 우열을 가려볼 만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월적인 위치에 설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과연 경쟁이라는 언표의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할까? 당연히 우월성을 점유하는 자들이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어떤 우월성을 가지고 있기에 경쟁력이라는 이름으로 평가받기를 원하는가? 대표적인 예로 급성장한 한국영화의 외형적 모습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영화산업이 급성장했다고 보는 입장은 최근 4∼5년 정도의 수치에 의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 수치가 가장 기초적인 분석도구인 관객동원력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본적인 수입률에 대한 데이터 하나 가지지 못하고 관객동원 결과와 점유율만 가지고는 실질적인 분석이 있었다고 할 수 없다. 이제 막 걸음마를 익힌 한국영화는 이제 정책산업의 연구가 시작하려는 찰나일 뿐이다. 오히려 한국영화의 경쟁력은 산업적 우월성에 있다고 판명하기보다는 문화적 정체성에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옳다. 만약 한국 영화산업이 상대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다면 우리의 작품은 이미 세계 속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미국영화의 산업적 측면의 우월성이 세계를 장악하듯이 말이다.

문제는 문화라는 것이 상대적 우월성이 보장되는 지점이 없다는 것이다. 문화는 우월성보다는 특수성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경쟁이라는 보편의 담론 속에서 해석하려 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보편의 담론은 그야말로 제국이 원하는 것이다. 경쟁은 자본주의 경제체계를 지탱하는 거대한 힘이자 생산성 향상을 위한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기제라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개방이라는 단어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개방을 통해서만이 한국영화가 발전할 수 있다는 믿음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개방 역시 철저히 경제학적인 용어이다. 굳이 과거를 돌아볼 필요도 없겠지만, 개방이라는 것은 앞선 세기들에 걸쳐 자행된 혹독한 경제의 정책이며, 그와 함께 경제적 이득과 독과점의 형태를 위한 제국주의의 진행과정이 취한 수단이었다. 만약 이 점을 간과한다면 최근의 몇몇 보수논객들의 아찔한 주장처럼 경제적 침탈을 끝없이 받아가던 시절을 문화적 부흥기로 수긍하며 추억하고 마는 유아적 발상과 동일한 방식의 우를 범할 수 있다. 이는 개방을 아직도 계몽이라는 ‘빛의 전달자’라고 믿어왔던 서구 낭만주의 시절의 사회학적 논리일 뿐이다. 물론 지금은 과거와 전혀 다른 논점으로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시절과의 시공간적 차이를 감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현재의 상황이 그렇게 변화되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안토니오 네그리의 담론처럼 국가의 개념을 넘어선 초(超)주권이 국가단위를 무색하게 하는 현재의 상황에서 진행되는 개방의 논리는 전술의 변화만 있는 경제제국의 한결같은 전략에서 비롯됨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 전략은 이후 경제·문화제국과 동일한 것임을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더욱이 현재 스크린쿼터의 축소가 우리 내부의 필요와 동의에 의해 충분히 검토된 것이 아니라 미국,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자본이 끈질기게 요구해온 결과라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이 점은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우리에게 영화는 산업인 동시에 문화다

지난해 10월 유네스코는 문화다양성협약을 채택하며 자국문화 보호를 위한 정책과 제도가 국제협정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선언하였으며, 2007년부터 이를 적용하기로 했다. 140여 국가가 이 협약에 찬성 하였으나, 유독 미국과 이슬라엘만은 반대를 하였다. 그들은 분명 자국의 이익을 위해 반대를 했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 이면에는 미국 스스로가 문화패권국가이자 제국이라는 것을 인정한 꼴이 된다. 결국 그들에게 영화라는 것 자체가 경제와 산업의 논리로 끝없이 되풀이되기를 희망하는 것은 당연한 논리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다르다. 우리에게는 산업으로서의 영화도 일정부분 존재하지만 동시에 문화적인 형태로서도 존재한다. 이것들 중 하나를 무시해도 그것은 절름발이 논리가 된다. 그러나 더 위험한 것은 경제적인 의미인 상품과 산업은 문화라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압도하는 힘을 가지며 동시에 그 문화를 평가하는 잣대가 된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이 한 영화의 평가가 영화적 규모로 판단되는 경향일 것이다. 이것은 한국 영화계도 반성해야 할 지점이다. 그러나 우리가 더욱 반성해야 할 것은 세계화의 속도가 언젠가 우리를 삼켜버릴 것이라고 단정하면서 우리의 문화정책의 일환인 스크린쿼터를 가지고 성급하게 도박을 하려 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직 우리 영화는 산업적 측면이 완전히 성장된 지점까지 도달하지 않았다. 이제 우리 영화계는 스탭노조를 만들며, 영화인 조합을 결성하면서 영화계의 산재한 병폐들을 시스템 자체의 변화를 통해 해결하려 노력하는 상황이다. 정말 경쟁은 우리의 영화계가 안정적인 시스템을 구축한 이후가 되어야 할 것이다.

문화란 고상하고 고급스럽고 권위적인 예술작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사유를 포함함과 동시에 사회의 생산구조, 사회관계를 구성하는 커뮤니케이션의 형태를 다시 포괄하고 그와 함께 전통적인 의식, 종교 사상 등과 같은 비가시적인 영역까지 구성하는 아주 포괄적인 의미이다. 사회학자 클리포드 기어츠의 말을 빌리자면 ‘문화는 거의 모든 것의 언표’인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그야말로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장르가 바로 영화다. 할리우드는 이러한 우리의 언표를 장악하려 하고 있다. 이 지점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항간의 스크린쿼터 논쟁에서 문화에 대한 논의가 진부한 것으로 치부되거나 이제 모든 것은 경제논리로만 환원된다면 아주 위험하다. 학자나 평론가는 이 문제에 있어서 가장 전방위에 있어야 하는 인물들이다. 만약 그런 인물이 쿼터의 문제를 균형 감각 없이 무한경쟁시대의 경제력이라는 서구 세계화의 구호만으로 일관하고 있다면 그의 존재가치는 희박해진다. 그 누구의 말대로 학자라면 학자다운 자리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