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현, ‘그 자리’에 도착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용현은 왜 윤종찬이 가고 싶어하지 않은 미금아파트 504호로 돌아오는가? 그는 중간에 길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504호로 다시 돌아온다. 그는 돌아온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순환 안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가 순환 안으로 들어오도록 광태는 강제적으로 자리를 비워주어야 한다. 그가 이 모든 사실을 다룬 소설을 쓰고 있었던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암시이다. 그 소설은 마지막 결말을 쓰지 못한 소설이다(그는 소설을 끝내기 전에 불에 타 죽고, 그 소설을 화재 속에서 건진 505호 이 작가가 용현에게 들려준다). 끝내지 못한 소설은 채워져야 할 것이다.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 용현은 그 자리에 온다. 광태는(그가 자살한 것인지, 아니면 사고를 당한 것인지는 명백하지 않다. 아마도 그는 용현의 어머니와 윤종찬이 함께 죽인 것 같다) 무언가에 계속 사로 잡혀서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은수에게 말했지만, 그것을 미루기 때문에 죽는다(그런데 그가 떠날 결심을 미루게 만든 이유는 은수의 임신중인 아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 이 영화에 나오는 모든 여자들은 아이를 잃어버리거나, 죽이거나, 지운다). 그 자리에 광태가 용현을 부르는 이유는 누군가를 호명하는 책임을 그 주인에게 떠넘기기 위해서이다(광태는 선영이 아니라 은수와 사랑에 빠진다. 광태는 선영을 순환으로 끌어들어지 못한다). 용현은 책임을 떠맡기 위해서 그곳에 도착하지만, 그는 그것이 운명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가 모르는 이유는 우리가 저주의 내용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용현과 같은 운명에 놓인다. 용현이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잘 알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윤종찬이 무언가를 계속해서 비워내고 그 안에서 결핍된 것을 채우기 위해 안간힘을 쓸 때(자동차를 몰고 가면서 사고를 당한 오토바이 라이더를 보고 손님과 함께 낄낄대고 웃을 때, 택시 회사에서 동료기사에게 갑자기 반말을 할 때, 아마도 죽여서 매장해버렸을 옛 애인에 대해서 친구에게 이야기하거나 형사가 물을 때) 그 안에서 용현이 잘못 도착했다고 믿고 싶어하는 저항을 본다. 용현은 그 자리에 정확하게 도착한다.
그러나 용현이 잘못을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역설이 있다. 어머니의 복수는 선영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용현이 선영과 섹스를 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미 거기서 복수는 완성된 것이다. 선영은 용현의 아버지의 사례를 정확하게 반대로 재현한 다음(아이를 죽이고, 그 다음 남편을 죽인다), 용현과 함께 남편으로 대리된 아버지를 묻어버리고 서로 다른 어머니의 이름으로 섹스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직 매장된 것이 아니다(선영은 말한다. “그 영감 참 이상하더군요. 집을 나가더니 돌아오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잘 매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돌아온다. 매장되지 않은 억압은 돌아온다. 돌아온 아버지는 어머니의 유품을 훔쳐내서 그 자리에 가려는 선영을 기어이 죽인다. 그럼으로써 결국 아버지의 어머니 살해는 반복된다. 하지만 그 반복은 기만이다. 반복은 실패한 시도들 속에서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정정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용현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른다.
그 잘못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전체 속에서 단 한 사람뿐이다. 이 숨바꼭질 속에서 술래는 윤종찬이다. 그는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자신이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애쓰는 사이에 사실은 잘못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가 저지르는 실수는 그의 강박관념이다. 같은 말이지만 그의 강박관념은 반복된 오류이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자기의 오류를 용현에게 떠넘기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가 안간힘을 쓰는 동안 그는 죽은 어머니이자 사라진 아버지이다. 그러나 그의 자리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 떠넘기기 위해서 순환할 것이며, 그것은 마치 수건놀이처럼 계속 의심하며 내가 술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사이를 떠돌 것이다. 그것은 악순환이며, 죄의 쉴 사이 없는 전이이다. 그 속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용현이다. 그는 술래들이 번갈아 부를 때마다 대답해야 한다. 그러나 호명은 부른 자의 명령이고, 대답은 용현의 행위이다. 호명과 대답 사이의 비대칭은 이 영화의 비극이다. 왜냐하면 용현은 결국 그 누군가를 위해서 자리를 양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누군가란 누구인가?
돌아보지 마라
용현이 마지막 순간 본 것은 아파트가 아니다. 정말 아파트란 여기서 아무것도 아니다. 그가 본 것은 죽인 선영의 유령이 아니다. 유령이란 내용이 비어 있는 형식의 질문이다. 또는 선영을 죽이도록 유인한 부모의 악순환이 아니다. 우리는 자장가에 속아서는 안 된다. 그 노래는 반대로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는 그의 어머니가 간절하게 하소연하는 목소리이다(여행에서 돌아온 자들을 유혹하는 사이렌의 노래, 지옥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데려나오려는 오르페우스를 유혹하는 노래. 부르는 자를 볼 수 없는 노래는 언제나 그것을 금지하는 경고이다). 그가 본 것은 그 누군가를 불러온 사람이다. 미금아파트 504호에 누군가 찾아오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 그래서 사건을 만들어서라도 누군가에 책임을 전가하고 죄를 전이시키려고 했던 그 누군가. 용현이 본 것이 누구인지 그 자신도 모르겠다고 윤종찬이 대답한 것은 정당하다. 왜냐하면 용현이 본 사람은 윤종찬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중이다. “아버지, 불타고 있는 제가 보이지 않으세요?”(프로이트, ‘꿈의 해석’ 7장)
PS: 이 영화의 장르는 공포영화가 아니다. 만일 구태여 장르로 불러야 한다면 이 영화는 ‘소름’(끼치는)영화이다. 공포는 그 안에 두려움에 대한 개념을 담은 대상이 있지만(공포영화는 그 대상에 대한 탐색이다), 소름은 낯선 친숙함을 깨닫는 순간 반응하는 감각이다. 그건 도망치다가 불현듯 술래가 자기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자아가 일으키는 경련이다. 윤종찬 감독과 편집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 영화의 영어제목이 무엇이냐고 묻자 “서럼”(So-rum)이라고 대답해서 깔깔 웃었다. 이 영화는 장르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 안의 상처는 장르의 약속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만일 내게 20자평이 허락된다면 <소름>은 “허우샤오시엔의 숨결로 만든 <킹덤>”이다. 물론 별점은 내 능력 바깥의 일이다.
정성일/ 영화평론가 hermes59@hanmail.net
▶ 허우샤오시엔의 숨결로 만든 <킹덤>, 그 심연에 놓인 것 (1)
▶ 허우샤오시엔의 숨결로 만든 <킹덤>, 그 심연에 놓인 것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