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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비우스 띠 위의 숨바꼭질
2001-08-16

허우샤오시엔의 숨결로 만든 <킹덤>, 그 심연에 놓인 것 (1)

● 살아오면서 가장 소름돋는 공포를 느꼈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생각해보면 내 자신이 이유도 동기도 없는 비극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을 때가 아니었을까?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은 반드시 찾아오고야 만다. 그럴 때면 한없이 살 떨리게 무서웠고, 절망적이었다

-윤종찬

편지를 보낸 사람은, 말한 바처럼, 뒤집힌 형식으로 편지를 받은 사람으로부터 자신의 전갈을 받는다. 도둑맞은 편지, 그러니까 지연되어서 고통받고 있는(en souffrance) 편지는 결국 목적지에 도착하고야 만다.

-자크 라캉 ‘도둑맞은 편지에 관한 세미나’

그것을 말해야 한다. 그러니 그것을 말하게 해다오.

-쇠렌 키에르케고르

윤종찬의 <소름>을 보면서 내가 가장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정작 용현이 선영을 죽이는 방이 미금아파트 504호가 아니라 낯선 장소의 어느 모텔 방에서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모든 사건이 504호를 중심으로 벌어지면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이 방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이야기이다. 그건 등장인물들뿐만 아니라 사실은 감독 자신도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아니 어쩌면 그 방에 가는 것을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은 윤종찬 자신이다. 그는 왜 504호에 들어가는 것을 무서워할까? 윤종찬은 용현이 그 방에만 들어서면 어떻게 해서든지 그 방에서 나오기 위해 구실을 대거나, 아니면 이웃집 사람들을 끌어들여 잡담을 듣거나, 잊어버리기 위해 섹스를 구경한다. 아니면 자꾸만 복도에서 사건을 만들어서 그 방에 들어가지 못하게 만든다. 그 방은 애매하게 남한사회의 알레고리를 펼쳐놓거나,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상징의 벽지를 구질구질하게 발라놓은 곳이 아니다. 만일 그것이 전부라면 오히려 우리는 그저 이렇게 대답하면 된다. 미금아파트를 부숴버리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방은 결코 불타 없어지지도 않으며, 빈 채로 놓아두어도 누군가가 와서 그 방을 자꾸만 채운다. 아내를 죽이고 아이를 버리고 도망친 사내가 떠나가고, 다시 그 방에서 광태가 소설을 쓰다가 불에 타 죽어도 그 방은 거기 그렇게 자꾸만 누군가를 불러서 채우려고 한다.

채워지지 않는 구멍

그 방은 ‘원인 안에 있는 구멍’이다. 그것을 채우려고 할수록 부채는 점점 늘어만 간다. 그들은 왜 부채가 늘어나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것은 이중장부이기 때문이다. 그 이중장부는 자꾸만 반복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말소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또는 그것은 대상이 아니라 과정이기 때문에 결코 붙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구멍을 자꾸만 만드는 과정인 이 이중장부는 무언가를 피하기 위해서 마치 그것이 대상인 것처럼 가장하고 있는 것이다. 윤종찬은 그것을 말소시키기 위해서 동분서주하지만, 그럴수록 그는 점점 더 말려들어간다. 그는 탐정처럼 굴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 자신도 이 사건의 구조 안에 포함되어 있는 등장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사건을 풀려고 할수록 점점 더 부채로 넘쳐나는 이중장부의 알리바이는 교묘해진다. 또는, 그는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지만 결국 속은 사람은 그 자신이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는 차라리 속는 편을 택한다. 왜냐하면 그는 여기서 불가능한 것을 입증하기 위해 애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소름>에서 물어봐야 하는 것은 윤종찬이 왜 불가능한 것을 입증하기 위해 그렇게 매달리는 걸까, 라는 질문 안에 있는 이상한 죄의식이다. 그는 승화되지 않는 억압 안에서 자꾸만 적대적인 것에 매달린다. 결국에 이 영화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서로에 대해서 모두 적대적인 관계에 놓이는 것은 그들 사이의 증오라기보다는 윤종찬이 그들과 화해를 시도하거나, 또는 그 인물들을 만들어낸 과정과 협상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미금아파트를 사회적인 두려움과 운명적인 근본주의적 암시 사이에서 그 원인과 효과를 숨바꼭질 상태로 내버려둔다. 그러나 그 술래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그는 끝까지 숨기려고 애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는 미금아파트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알레고리로 만들거나 상징으로 만들 만큼 알지 못한다. 그가 미금아파트 504호의 비밀을 알고 있다면 그렇게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는 우리를 이 아파트로 끌고 가지만, 그 아파트의 비밀을 파헤치기는커녕 점점 더 무아지경의 꿈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한다. 가끔씩 깨어나기는 하지만(짧은 숏으로 지나가는 포장마차에서 선영과 용현이 만두를 먹는 장면, 선영이 편의점에서 퇴근하는 장면, 거리에서 이소룡 흉내를 내는 용현), 그러나 점점 더 헤어나오지 못하는 꿈 안으로 들어간다(이 작가 방에서 술 마시는 장면, 연못에서 데이트하는 장면, 그리고 물론 용현이 선영을 죽이는 장면). 이 영화의 롱 테이크들은 단지 길게 찍힌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내용이 그 자체로 완성된 꿈결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베어내어서 잘라 나누는 순간 그들은 깨어나는 것이다.

풀리지 않는 여섯개의 매듭, 그 끝없는 순환

<소름>은 이 안에서 자아와 실재 사이의 매개를 찾아 헤매지만 번번이 매개는 소실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그는 매듭을 이상한 방식으로 묶어놓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상한 까닭은 그가 이 매듭을 이중 삼중으로 매어놓았지만, 그중 하나만 풀면 나머지 매듭이 갑자기 풀려버릴 것 같기 때문이다. 첫 번째 매듭은 용현의 아버지가 이웃 여자와 눈이 맞아 아내를 죽이고 갓난아기를 버리고 도망쳤는데, 버려진 아기가 뒤이어 일어난 화재현장에서 살아 남았다는 사건이다. 여기서 결코 채워지지 않는 구멍은 죽었다고 전해지는 아내의 시체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구조 안의 배제이다. 기대된 존재는 자신을 부르지만, 그 호명에 대답하지 않는다. 두 번째 매듭은 용현의 아버지가 도망친 여자와 낳은 딸아이가 자라서 선영이 되어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504호의 대각선 방향인 501호에 살고 있다. 이 두 번째 매듭은 이중적인데, 그녀는 남편과 싸우다가 그만 아이를 죽게 방치한다. 그리고 남편을 죽인다. 그녀는 두번 매장한다. 이 매듭은 마치 첫 번째 매듭의 반복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반복이라기보다는(거울에 비쳐 반대방향으로 반사된) 징후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게다가 이 방은 504호와 대각선으로 반대방향에 자리잡고 있다).

세 번째 매듭이 가장 이상한데 504호에 살다가 불타 죽은 광태이다. 그는 이 사건이라고 부를 수 있는 구조 전체의 잉여이다. 그러나 그를 불필요한 잉여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는 은수와 연인이자 그녀의 배 안의 아이의 아버지였는데, 그는 결국 아버지가 되지 못한다. 은수는 임신중절을 한다. 그 은수는 선영과 자매처럼 지내는 이웃집 피아노 강사이다(나는 이 영화를 맨 처음 보았을 때 이 둘 사이를 자매라고 착각했다. 그래서 나중에 왜 그런 착각을 했을까, 라고 생각해보았더니 이상할 정도로 혈연이라는 문제가 거의 강박관념처럼 사방에서 서로를 묶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혈연과 반복 사이의 동일시를 만들어내는 환상의 전이가 등장인물들을 사로잡고 있다). 여기에는 버려진 아이에 대한 은유, 부모가 자식에게 가져야 할 윤리적 태도에 대한 죄의식의 전이가 있다. 그런데 여기에 광태가 말소됨으로써 인과응보의 대구는 불구의 구조가 된다. 여기서 광태가 불타 죽은 이유는 그가 나가야만 용현이 그 방에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말이지만 자리를 잘못 차지한 그가 나가지 않으면 용현은 그 방에 들어오지 못한다. 그는 자리를 잘못 찾아온 반복이다. 또는 광태는 용현의 어머니가 죽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잉여이다(그렇지 않다면 누가 그를 불태워 내보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광태는 용현의 어머니와 다른 방식으로 죽지 않으려고(그의 소설을 빌려서) 버티는 시체이다.

네 번째 매듭은 광태만큼 이상한 인물인(영화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지만, ‘하여튼’ 사라져버린) 용현의 옛 애인이다. 용현이 친구에게 행방을 물어보고, 그 반대로 형사가 찾아와 행방을 묻는 그녀는 아마 용현이 죽여서 매장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잉여가 되어 영화에 머문다. 다섯 번째 매듭은 금기의 위반이다. 용현과 선영은 근친상간을 벌인 다음, 그 반대로 용현이 선영을 죽이는 근친살해를 맞는다. 그런데 이 매듭이 이상한 것은 끝내 남매의 정서를 끌어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같은 아버지와 서로 다른 어머니 아래서 자라난 용현과 선영은 선영이 자살하려고 마음먹는 순간 만난다. 자살의 순간은 유예되고, 용현은 아버지처럼 선영을 돌보면서 다가와서 선영의 남편 시체를 같이 유기하고 섹스를 한다. 그 다음 용현은 남편을 빼앗긴 아내의 자리에서 그 딸에게 복수하는 것처럼 선영을 살해한다. 용현이 자기가 만나보지 못한(그는 자기 입으로 고아라는 이야기를 두번이나 한다) 대상과의 동일시를 통해서 번번이 히스테리에 빠지는 것은 그 대상이 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 중에서 누구와 동일시해야 할지를 끝내 결정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하나를 버리고 싶지만, 그것은 결국 둘 다를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소름>의 가장 중요한 고정점이 결정된다. 나쁜 선택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차라리 용현을 죽이는 길이다. 그러나 용현을 살리는 편을 택함으로써 결국 이 영화는 나쁜 아버지와 무서운 어머니를 보존한다. 그를 죽일 수는 없다고 결정함으로써 영화는 왜상(歪像)을 유지하는 편을 택한다. 왜 죽이지 못하는 것일까? 차라리 선영을 죽이는 편이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나쁜 선택은 윤종찬의 여섯 번째 매듭이다(이 영화는 시나리오도 윤종찬 자신이 썼다). 이 매듭은 용현을 미금아파트에 도착하지 못하도록 왜 더이상 미루지 못했을까(또는 않았을까), 라는 의문이다. 그럼으로써 결국 이 매듭들은 아무것도 풀리지 않으면서 결국에는 붙들리지 않는 구멍들이 된다. 왜냐하면 용현은 대상이 아니라 순환이며, 과정이며, (같은 말이지만) 무의식 안의 증후이기 때문이다.

▶ 허우샤오시엔의 숨결로 만든 <킹덤>, 그 심연에 놓인 것 (1)

▶ 허우샤오시엔의 숨결로 만든 <킹덤>, 그 심연에 놓인 것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