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스크린쿼터 관련 법 개정에 대한 소식이 프랑스 언론에 알려졌을 때, 어느 누구도 이러한 사실을 보도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하지 않았다. 영화전문 주간지 <르 필름 프랑세>(Le Film Francais)만이 “한국영화가 마지막 영광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다소 조심성 없는 짤막한 기사를 실었을 뿐이다. 물론 신문의 페이지 수를 늘릴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고 지금 프랑스는 법적, 정치적으로 심각한 위기 국면을 맞고 있기도 하다. 우선 프랑스 언론이 침묵을 지키는 이유 중 하나는 프랑스 국민들이 스크린쿼터의 생존을 ‘핫이슈’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침묵을 설명하기에 충분치 않다. 더군다나 그간 프랑스 언론이 얼마나 여러 번 스크린쿼터에 대해 이야기하고 사수 투쟁에 대해 보도했는지를 생각해보면, 이런 침묵은 놀랍기 그지없다. 이번 침묵은 지역적으로 먼 곳의 소식에 대한 관심의 부족 이외에도 인기를 얻고 있으면서 예측불허인 한국영화 앞에서 당황스러워하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국은 최근 몇년간의 과다한 노출에 대한 값을 치르고 있다. 언론은 갖가지 형태로(영화산업 관련 기사, 영화제, 스케치, 영화평 등으로) 적어도 한번쯤은 ‘한류’를 다루었고,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어떻게 신화적으로 국제시장 진출을 위해 나아가고 있는지 언급해왔다. 그러니 스스로 문제시되기에 느린 언론으로선 한국을 갑자기 위협받는 영화산업으로 다룬다는 것이 모순되게 보였을 것이다. 한국영화가 알려지지 않고 스크린쿼터에 대한 위협이 닥쳤을 때, 프랑스 언론은 논리상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장애아동에게서 목발을 빼앗거나 장미의 마지막 남은 가시를 떼어내는 것만큼이나 눈뜨고 볼 수 없는 이미지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외에서 한국영화의 성장과 함께 한국인들조차 그들의 시스템 결함에 대해 해외에 알릴 생각을 못했다. 아니, 알릴 수 없었거나 또는 알리기를 원치 않았을지도 모른다. 필자가 알기로는 제작자 이승재 대표만이 몇달 전 경제일간지 <레 에코>(Les Echos)에서 “대부분의 한국영화 제작사는 적자를 내고 있다”라고 밝혔다. 어쩌면 한국에는 잘 알려진 사실일지 모르지만, 이 점은 큰 표제를 달고 보도될 만큼 프랑스에서는 극히 놀라운 사실이었다. 전반적으로 최근 몇년 사이 프랑스에서 한국은 외부와의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소홀히 하면서 절대 침몰하지 않는 항공모함의 이미지를 형성했고, 그 결과 악천후에도 SOS는 효과를 발휘하기 힘들어진 것이다.
멀리서 보기에 사람들은 한국의 스크린쿼터가 지니는 상징적 가치와 축소 결정이 가지는 폭력성에 대해 과소평가하는 것 같다. 비교하자면 프랑스의 라디오는 10여년 전부터 프랑스 가요에 쿼터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한국영화처럼 폭발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쿼터제도는 프랑스 가요가 과거의 아코디언 멜로디에 갇히는 것을 막고 그런대로 역동적으로 남을 수 있게 해줬다. 물론 프랑스 가요 쿼터가 한국 스크린쿼터와 같은 방식으로 인식되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은 프랑스 가요 쿼터의 존재조차 잊어버렸지만, 매스컴을 통해 잘 알려진 한국의 스크린쿼터는 상징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스크린쿼터는 미국에 맞서 한국 정부와 국민 그리고 영화를 이어주는 동맹이자 저항(레지스탕스)의 약속과도 흡사하다. 따라서 스크린쿼터를 범하는 것은 경제적인 맥락을 변화시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배신 행위이며, 사람들은 그 파급효과를 계산하지 못하고 있다.
프랑스 언론이 침묵을 지키는 세 번째 이유는 가장 미묘한 부분일 것이다. 한국영화 필모그래피는 너무 눈부신 나머지 적어도 프랑스적인 관점에서는 보호받고 있는 산업의 작품들 같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 영화산업은 작가주의 영화보다는 흥행과 상업 장르 영화 위에 자리하고 있다. 한국영화가 프랑스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을지 몰라도 이런 인기는 90년대 또는 훨씬 이전에 (임권택 감독의 경우) 나타난 다섯이 채 안 되는 감독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최근 몇년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악어>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거짓말> <눈물>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등에서처럼 어떠한 범주로 규정지을 수 없는 영화들을 접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렇지만 우리는 <쉬리>가 아닌 이런 영화들이 한국영화에 대한 서양인들의 시선을 주목시켰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프랑스에서 김기덕 감독의 발언이 장동건의 발언보다 더 큰 효과가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프랑스 가요 쿼터가 셀린 디온이나 파트리샤 카스의 배급을 장려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것처럼 한국 스크린쿼터도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호한다면- 프랑스 영화 마니아적 관점에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문화적 예외에 대한 프랑스의 담론은 이렇듯 흥행에 대한 권리가 아니라 실패와 재능있는 시나리오에 대한 권리에 기초한다(이런 것은, 예를 들어 미국인에게는 완전히 미친 짓 같아 보일 것이다). ‘예술 & 실험’(Art et Essais)이라는 프랑스 용어도 여기서 유래한다. 한국의 상황을 외국에 더 잘 알리기 위해서는 스크린쿼터의 수혜를 받은 주인공들 외에 이번 위기를 계기로 하여 시스템의 혜택을 받지 못한 이들에게 발언권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프랑스 언론이 스크린쿼터 유지 시위에 신속하게 대응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한국의 작가들과 데뷔작과 두 번째 작품의 편수, 그리고 한국이 매년 프랑스 관객에게 선사할 수 있는 새롭고 신선하며 독창적인 시선의 숫자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