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계속되는 영화인의 시위를 보다가 궁금해졌다. 지금의 영화계를 바라보는 지식인들의 생각은 어떤 것인지. 당신은 어느 편에 서겠냐고 다그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이번호에 실린 다섯 필자의 글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들은 대체로 중간파에 가깝다. 쿼터 사수 투쟁에 우호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스크린쿼터만 지키면 된다고 주장하는 입장은 아닌 것이다. 쿼터 사수의 전선을 흩트리는 시도라고 오해할 수도 있지만 최근 사태를 보면 이번 투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에 대해 터놓고 얘기하는 게 필수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쿼터 문제에 관해 그저 혼란스러워 할 뿐이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얽히고 설킨 문제를 정리하는 논쟁의 2라운드가 필요한 시점이다.
프랑스 평론가 아드리앙 공보는 이번 쿼터 축소 조치가 프랑스 언론의 관심을 끌지 못한 이유가 쿼터제도가 산업을 보호하는 것인지, 예술을 보호하는 것인지 분명치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영상원 교수 김소영은 마이너영화 쿼터제를 주장한다. 쿼터가 문화다양성을 위한 것이라면 국적을 기준으로 삼는 것보다 정밀한 제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장 목에 칼이 들어와 있는 상황에서 한가한 말로 들릴 수 있지만 귀담아들을 얘기들이다. 왜냐하면 쿼터 투쟁에서 영화계가 얻어야 할 것이 줄어든 쿼터 일수 73일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몇몇 영화가 스크린을 독점하는 현상을 들 수 있다. 쿼터 축소는 이런 독점을 심화시킬 것이므로 반대해야겠지만 쿼터가 유지된다고 저절로 해결될 문제 또한 아니다. 쿼터 사수가 문화다양성을 지키는 투쟁이라면 영화계가 나서서 대안을 제시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마이너영화 쿼터제를 시행하거나 개봉관 수 제한조치를 취하자는 논의가 이참에 나오길 기대해본다(문광부가 4천억원 지원 대신 이런 카드를 제시했다면 어땠을까? 재경부가 아니라 문광부라면 당연히 이런 식의 대안을 고민했어야 한다!).
논쟁의 또 다른 측면은 좀더 정치적인 성격을 지닌다. 2월17일 촛불문화제를 보면 확인되겠지만 영화인대책위는 투쟁의 방향을 쿼터 사수를 넘어 한-미 FTA 반대로 확산시키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한-미 FTA에 가장 격렬한 저항을 벌이고 있는 농민과 힘을 합치겠다는 것이다. 음악평론가 강헌은 영화인들에게 이번 투쟁이 미국의 강압에 대한 저항임을 분명히 하라고 말한다. 이럴 경우 쿼터 투쟁은 미국 중심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정치투쟁이 될 것이다. 프랑스의 68년 혁명의 도화선이 파리 시네마테크 원장 앙리 랑글루아를 해임한 데서 촉발됐다는 걸 기억해보면 안 될 것도 없다. 설령 이기지 못할 싸움이라도 반대할 건 반대한다는 의사표현은 분명히 하자는 것이다. 그건 쿼터 투쟁이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의 충돌임을 보여주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정부에선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게 됐다고 땅을 치고 후회할지도 모른다.
지난 2주간의 여론추이를 보면 당장 쿼터 수호 구호만 열심히 외치는 것으로 대중의 전폭적 지지를 얻긴 힘들어 보인다. 절망적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낙관하기도 힘든 싸움인 것이다. 아무래도 투쟁의 다음 단계는 영화계를 보는 냉소적 시선에 답하는 조치를 내놓는 것이 돼야 하지 않을까. 거대한 적과 싸울 때 내부 결속은 가장 강해지는 법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