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지 알 수 없는 대한민국의 어느 외진 마을에 천사의 집이라는 허름한 고아원이 있다. 거기에는 부모를 잃은 고아 몇명과 그들을 돌보는 원장과 그의 하수인 두명이 산다. 그러나 이곳은 평범한 고아원과는 완전히 다른, 하나의 동떨어진 세계다. 그건 원장의 어떤 방침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식사 시간이 따로 없다. 배가 고픈 아이들이 먹을 수 있는 것은 고작 해야 초코파이와 우유뿐이지만, 그것조차 그들은 모여서 맛있게 먹지 못하고 침대 밑에 숨거나 변소에 숨어 제각각 얼른 먹어치울 뿐이다. 먹는 행위는 곧 죄악이고, 신이 인간에게 내린 원죄의 형벌이고, 그 형벌로서 매번 깨달아야 할 의미는 바로 수치심이라는 원장의 가르침이 아이들을 그렇게 하도록 만든다.
아이들 중에서도 원장의 말을 가장 믿고 잘 따르려는 신성일이라는 아이가 있다. 그는 고아원에서 제일 뚱뚱하지만, 가장 신심이 깊다. 다른 아이들은 하지 않으려는 단식을 시행하고, 그것에 실패하자 죄책감에 시달릴 정도다. 신성일은 초코파이를 먹을 때마다 자기가 저지르는 이 죄가 부끄럽다.
어느 날, 이영애라는 당돌한 소녀가 이곳에 새로 들어온다. 소녀는 이 세계의 교리가 가르치는 먹는 것의 수치스러움을 모른다. 그래서 백주 대낮에 마당에 앉아 다른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비빔밥을 비벼 먹는다. 고아원에는 파란이 일어난다. 원장은 아이들을 한자리에 불러놓고, 성일과 영애와 민기에게 다른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억지로 비빔밥을 먹게 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이미 기도실에서 하수인과 마주앉아 밥을 먹는 원장을 보았다는 민기의 목격담을 들은 뒤다. 일명 보스로 불리는 아이와 그의 친구 김갑수는 원장을 몰아내고 떳떳하게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고아원으로 만들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다. 그 와중에 신성일은 고아원을 도망쳐 더 큰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그곳에서 신성일은 먹는 것을 수치스러워하지 않는 이상한 사람들을 경험하지만, 그동안 받아온 세뇌를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먹고 싶다는 배고픔과 먹어서는 안 된다는 믿음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다. 신성일의 행방불명은 그렇게 생긴 일이다.
이 이상한 이야기 <신성일의 행방불명>은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라는 단편으로 반란의 상상력을 선보여 실력을 인정받은 신재인의 첫 번째 장편영화다.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에서 이준섭이라는 소년의 재능은 뭐든지 먹어치우는 것이다. 그는 지우개 똥에서부터 좋아하는 여자친구의 똥까지 뭐든지 먹는다.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는 물고문 받는 한 남자가 일으키는 착란의 연쇄적 세계다. 그 고통스런 착란 속에서 주인공은 목사에 맞서고, 교리를 자기 방식대로 행하면서, 말씀을 물바다로 만들어버려, 진실을 전진시킨다.
신재인의 이 두개의 단편과 첫 번째 장편 사이에는 이어지는 고리와 유사한 사고 양식이 즐비하다. 그중에서도 ‘입’은 첫 번째 흥미로운 것이다. 감독은 “식욕과 그 억압이 소재가 될 수는 있고”, 자신이 “한명의 관객으로 이 영화를 보더라도 믿음과 배반에 관한 영화로 읽힌다”고 <신성일의 행방불명>에 대해 설명한다. 그런데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것이 입이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신재인에게 입은 정념의 동굴이며, 그는 입의 기능을 빌려 영화를 만들었다.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에서 이준섭은 모든 걸 그 입으로 먹는다. 똥까지 먹는다.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에서 끝없이 흘러나오는 것은 말이다. 그 말은 말씀과 진실의 난립인데, 그것도 입에서 나온다. 그의 입에서는 어느덧 진실만 콸콸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걸 형상화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와 홍수를 만든다(비유가 아니라 실제 그런 장면이 있다).
입은 식욕을 실행하는 신체이며, 말씀을 옮기는 도구다. 그런데 입이 행하는 먹는 행위와 말씀의 전파가 <신성일의 행방불명>에서는 의미가 전도된 채 동석한다. 식욕은 여기서 재능이 아니라 죄악이고, 원장은 그것을 진실이 아닌 거짓 말씀으로 다스린다. 이 영화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여기에 자리잡는다. ‘말씀은 거짓인데, 그 거짓을 믿는 신념은 진짜’라는 점이다. 앞으로 신재인이 입의 기능이 아닌 다른 것을 매개로 영화를 만들어도 이 문제는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신성일의 행방불명>은 무엇보다 그 아이러니를 염두에 두고 봐야만 한다. 밥과 똥, 입과 항문의 친연성은 예컨대 그 아이러니를 부각하기 위해 동원되는 양 극단이다. 아이들이 초코파이를 변소에서 숨어 먹는 것은, 대변보는 행위와 먹는 행위를 엇비슷하게 만든다. 아니면 뭐가 다른지 모르게 만든다. 항문에서 나온 것을 입이 먹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에서 “정말 사랑한다면 내 똥을 먹어보라”는 여자아이의 말을 이준섭이 따를 때 그것이 사랑의 확신을 보여주기 위한 당당한 의식이 될 수 있다면, <신성일의 행방불명>에서 밥을 먹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건 다름 아닌 신념의 문제에 따른 것이다. 그냥 신념이 아니라, 신념에 대한 문제다. 그 문제는 ‘거짓된 말씀에 대한 올곧은 신념과 잘못된 신념의 철통 같은 수행’이라는 딜레마를 공존하게 한다. 신재인의 영화 속에는 말씀(또는 진실)과 거짓 사이에 무언가가 동석하는 딜레마가 있는 것이지, 사실이란 것은 없다. 당연하다고 말해지는 것들, 안 된다고 말해지는 것들이 세상에는 있는데, 도대체 왜 그런지, 정말 당연하거나 안 되는 건지, 그걸 같이 놓고 보면 어떻게 되는지 보자고 감독은 권유한다. 가치가 전도되고, 상식과 비상식이 무너지고, 그걸 상상으로 열어젖히는 길은 그래서 뚫린다. 사실 이런 시도- 양극단을 뒤집거나, 부딪치거나, 공존시켜서 얻어내는 짜릿한 배신감- 가 세상에 대한 오기나 칭얼거림에서 시작되었다는 의심을 버리기 힘들지만, 어쨌거나 아직까지는 그 불안한 느낌을 상상적 양식의 돌파구로 극복하고 있다. 이런 영화는 흔치 않다.
<신성일의 행방불명>은 감독이 이름 붙인 신재인 랜드라는 제작사에서 만들어졌다. 감독은 스스로 자기의 땅을 범속의 땅과 가른다. 그곳이 신재인의 가나안이다. 거기에는 젖과 꿀 대신 뒤집힌 현실과 바로 선 상상이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