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잘 가꾸어진 공원보다는 거친 자연이 좋다. 거친 대자연이야말로 나에게 영감을 안겨주는 존재다”라는 월트 디즈니의 호언과는 달리 디즈니 세계는 약육강식의 대자연과는 별로 닮은 점이 없었다. 이게 꼭 월트 디즈니만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애니메이션은 예로부터 우화(寓話)를 그려내는 가장 효과적인 예술이었고, 애니메이션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자연법을 모르는 선한 금수들의 놀이터였다. 심지어 먹이사슬을 소재로 삼은 애니메이션들도 그리 잔혹하게 굴지는 못한다. 톰은 제리를 이빨로 짓이겨 삼키지 못하고, 불쌍한 코요테는 로드런너를 평생 쫓아다니기만 할 테니 말이다. <폭풍우 치는 밤에>는 디즈니나 루니툰과는 조금 다른 세상으로 관객을 데려간다. 영화는 시작부터 잡아먹히는 염소의 단발마를 들려주며 물감과 CG로 그려진 세계가 약육강식의 법도를 지키고 있음을 음험하게 속삭인다. 과연 잔혹한 자연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이 친구가 될 수 있을까.
폭풍우를 피해 오두막에서 쉬던 염소 메이는 다리를 다친 늑대 가브를 만난다. 칠흑 같이 어두운 오두막에 갇힌 둘은 마침 코감기에 걸려 상대방의 냄새조차 맡을 수가 없다. 암흑 속에서 담소를 나누던 그들은 서로에게 공통점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다음날 오두막 앞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다. 서로를 알아보기 위한 암호는 ‘폭풍우 치는 밤에’. 다음날 만남의 장소에 도달한 둘은 서로의 정체를 알고는 경악하지만, 먹이사슬의 계급을 뛰어넘어 친구가 되기로 결심한다. <폭풍우 치는 밤에>의 초반부는 그들이 본능을 억제하고 우정을 지키기 위해 발생하는 천진난만한 에피소드들로 가득하다. 특히 나카무라 도오루(<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목소리를 빌려 ‘점심이랑 점심을 먹다니, 한쪽 귀라도 먹어버릴까?’라고 독백하며 입맛을 다시는 가브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만한 캐릭터다.
속한 자리가 다른 그들이 우정을 지키기란 쉽지가 않다. 둘의 관계는 곧 염소 무리와 늑대 무리에게 발각된다. 처벌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서로의 무리에 대한 정보를 캐오는 것. 기로에 놓인 가브와 메이는 ‘반드시 살아서 만날 것’을 믿으며 급류에 몸을 던지는 편을 택한다. 종의 규칙을 배반했지만 그에 당당히 맞설 수 없었던 존재들이 일종의 숭고한 자살을 선택하는 셈이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살아남아 산 너머 전설의 숲으로 향한다. “저 산 너머에 가는 건 어떨까. 거기라면 늑대와 염소가 같이 살 수 있을 거야.” 그러나 늑대들에 쫓기며 눈보라 치는 겨울산을 넘던 그들은 가장 가혹한 시험대에 오른다. 배가 고파진 것이다. 메이는 가브에게 자신을 잡아먹고 끝까지 살아남으라고 조용히 말한다. “모든 생명은 죽어. 하지만 우리가 보낸 시간은 사라지지 않아. 길고 짧은 차이일 뿐이지.”
<폭풍우 치는 밤에>는 250만권 이상이 팔려나간 기무라 유우이치의 7부작 그림책 <가브와 메이 이야기>를 각색한 작품이다. 원래 원작자 기무라는 가브가 메이를 지키기 위해 죽고, 메이는 가브를 계속 기다린다는 슬픈 결말로 6부작을 마무리지었다. 이는 해리 포터의 죽음을 끊임없이 암시해온 조앤 롤링의 매정함과도 다르다. 애초에 <가브와 메이 이야기>는 <해리 포터>보다도 어린 독자층을 위해 만들어진 그림책이기 때문이다. 6권을 마무리한 기무라는 “태어나서 한번이라도 무언가에 열중해서 빛나는 순간이 있었다면 좋은 것이다. 늑대와 염소는 만나서 우정을 쌓으며 빛이 났다. 둘의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각자 납득한 인생을 산 것이다”라고 (마치 메이처럼) 말했다. 하나 기무라 유우이치의 마음을 누그러뜨린 것은 가브가 살아돌아올 것임을 믿는다는 어린 독자의 편지였다. 그는 가브와 메이가 다시 만나는 7권을 썼고, 그것은 그대로 영화 <폭풍우 치는 밤에>의 결말이 되었다.
사실 희망적인 영화(와 책)의 결말은 너무나 꿈만 같아서 맥이 빠지는 것도 사실이다. 세상의 많은 동화는 소년과 소녀들을 매몰찬 현실로 돌려보내며 불멸의 가치를 얻어왔다. 오즈에 당도한 도로시가 캔사스로 돌아오듯이, 이상한 나라로 떠난 앨리스가 현실로 돌아오듯이, 아이들은 동화의 세계에 영원히 머무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성장한다. 그래서 천국 같은 산 너머의 숲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영화의 결말은 주인공과 관객을 영원히 어린아이로 가두어두려는 괜한 시도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원작 그림책과 달리 지나칠 정도로 귀엽고 앙증맞게 그려진 캐릭터들은 끊임없이 약육강식의 세계관을 희석시킨다. 이같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폭풍우 치는 밤에>가 관객의 심장을 울린다면, 그것은 더없이 풍요로운 이야기의 결 덕택일 것이다. 종을 초월한 신의를 위해 자기 희생을 감수하는 가브와 메이는, 로미오와 줄리엣이고, 웨스트사이드의 마리아와 토니이며, 사랑의 도피길에 오른 랭보와 베를렌느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폭풍우 치는 밤에>는, 다른 계급과 인종과 성적 취향으로 고통받는 세상의 모든 이들을 위로하는 현대 우화다.
<폭풍우 치는 밤에>를 언급하며 감독인 스기이 기사부로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1958년에 도에이 동화에 입사한 그는 같은 해 야부시타 다이지가 연출한 일본 최초의 상업 애니메이션 <백사전>(白蛇)에 참여했고, 62년에는 오사무 프로덕션으로 건너가 일본 만화의 신이라 불리는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들에서 재능을 발휘했다. 이후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를 원작으로 한 <은하철도의 밤>(1985), 아다치 미쓰루 원작의 걸작 야구 만화 <터치>를 각색한 <터치-등번호가 없는 에이스>(1986)에 이르기까지, 스기이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역사에 지워지지 않는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왔다. 물론 그는 동시대의 린 타로나 선배 데즈카 오사무의 경지에는 결코 이르지 못했고, 앞으로도 이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여전히 일선에서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간결하고 소박한 <폭풍우 치는 밤에>가 실제보다 더 큰 영화로 느껴지는 까닭은, 노장의 삶과 철학이 한장의 셀과 한 바이트의 CG마다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