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면 못 살 게 없다고? 재벌가문의 상속자인 열아홉살 재경(현빈)을 보고 있노라면 그 말은 틀려 보이지 않는다. 싸움이 붙어도 합의금으로 해결하겠다는 자세로 마음껏 주먹을 날리며, “내가 말하기 전에는 아무 말도 하지 말랬지”라면서 친구들을 거느릴 수 있는 건 막대한 돈 덕분이다. 게다가 주민등록증을 발급받는 날이면 할아버지가 남긴 어마어마한 유산까지 물려받게 돼 있으니 그의 ‘머니 라이프’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참이다. 그런데 상속일이 되자 변호사는 유언장을 빌려 엉뚱한 말을 던진다. “강원도의 한 고등학교로 전학가서 졸업장을 받지 못하면 유산은 없다.”
<백만장자의 첫사랑>의 서두는 <집으로…>와 <웰컴 투 동막골>을 떠올리게 한다. 재경이 강원도 산골로 내려가 낯설기 짝이 없는 시골 생활에 적응하는 폼새는 전자를, 비현실적으로 착하기만 한 친구들과 주민들의 모습은 후자를 닮았다. 물론 재경이 전원 생활과 주변 사람들의 지극한 태도에 감화받고 졸지에 회개할 리는 없다. 그는 이 판타지 같은 상황 앞에서 “지들이 천사야?”라고 지극히 현실적인 반응을 보인다. 그는 강원도의 순박한 삶을 통해 인생의 교훈을 얻으라는 할아버지의 뜻을 간파하지만, 받아들이진 않는다. 짜증이 난 재경은 결국 하늘에 대고 악을 쓴다. “강 회장님, 계획은 알겠는데, 세월 변한 건 계산 못 하셨죠?”
이 철없는 개망나니 재경이 돈으로도 못 사는 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건 소녀 은환(이연희) 때문이다. 재경은 자신의 주변을 맴돌던 은환에게 사랑을 느낀다. 그리곤 이내 동방신기의 노래와 함께 애절한 시한부 러브스토리가 시작된다. 하지만 재경이 왜 갑자기 은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됐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고, 전반부의 현실적인 모습은 어디 갔느냐고 불평하는 건 이 슬픔에 겨운 사랑이야기 앞에서 야박한 태도가 될지도 모른다. 현빈의 안정된 연기와 신인 이연희의 청아한 매력은 보는 이의 눈가에 얼룩을 남길 만하고, 두 사람의 긴 인연이 밝혀지는 대목도 신선하지만, 문제는 별 굴곡도 없이 밋밋한 슬픔의 감정이 지나치게 오래 지속된다는 점이다. ‘세월 변한 건 계산 못 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진작 한계치에 도달한 감정이 반복되고, 이야기는 예상치에 가까워진다. “그냥 쿨하게 끝낼게요”라는 극중 재경의 대사를 영화 안에 조금만 더 반영했다면 <백만장자의 첫사랑>은 새로운 감성의 시한부 사랑이야기가 됐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