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가극 <당의 참된 딸> 남한에서 재현되다
“허리를 의자에 바짝 붙여서 앉으세요!” 엄숙하고 진지한 경청 자세를 주문하는 스탭들의 말이 별반 먹히지 않는다고 판단해서일까. 안 감독은 직접 마이크를 들더니 1천여명의 보조출연자들에게 솜씨 좋은 이야기꾼처럼 혁명가극 <당의 참된 딸>이 어떤 내용인지 간략하게 설명한다. 그 덕에 잠시 술렁임이 잦아들긴 했는데, 무대와 객석 사이에 마련된 이동무대에 가려져 있던 차승원이 호른 연주에 앞서 잠시 일어서자 객석은 또다시 “와∼” 하는 술렁임이 인다. 그냥 앉기는 멋쩍었던 것일까. 차승원은 손까지 한번 들어 보이고선 “연습할 때마다 부숴버리고 싶었던” 호른을 금세 집어든다.
<당의 참된 딸>은 <꽃파는 처녀> <피바다> 등과 함께 북한의 5대 혁명가극 중 하나다. 인민군 소속 간호사 강연옥이 미군의 폭격에 부상당한 동료들을 후송하는 데 성공하지만, 결국 자신은 목숨을 잃는다는 내용. 한재권 음악감독은 “기승전결로 구성된 원작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규모”라면서 “음악만 하더라도 원곡을 가져다 쓸 수 없어서 러시아 혁명가곡 8마디를 빌려와 4분여 동안의 대체음악을 만들었다”고 일러준다. 제작진에 따르면, 체코에서 새로 음악을 연주해 후반작업 때 덧입힐 예정. “우리는 열흘 이상 걸리는데” 그쪽에선 “하루만에도” 가능하다는 게 한재권 음악감독의 설명이다.
규모는 비할 바 없다지만, 실제 북쪽의 혁명가극을 눈앞에서 대하는 듯하다. 하지만 전날 밤 늦게까지 리허설에 매달린 안 감독은 성에 차지 않는 눈치다. “특효팀 폭약 다시 심어주고…”라고 지시하는 걸 보면. 유령처럼 날아다니며 무대 안팎을 스케치하는 지미집 카메라의 움직임과 속도가 맘에 들지 않는 안 감독은 박용수 촬영감독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있다. 워낙 큰 장면이다 보니 테이크를 한번 더 가는 것도 용의치가 않다. 무대를 다시 세팅하다 보면 적어도 20분은 걸린다. 그동안 ‘위생실’에 갈 짧은 시간이 주어지고, 객석은 또다시 복잡하게 헝클어진다.
한 인간의 병은 세상의 병이다
하지만 취재진에겐 용변을 볼 시간도 없다. 망원렌즈로 주인공을 들여다봐야 했던 취재진이 일제히 일어나 무대 앞으로 달려간다. 무대가 무너진다며 제작부가 막아서지만 멀찌감치 떨어져서 지켜봐야 했던 취재진은 물러설 기미가 없다. 승강이가 벌어지고, 한쪽에서는 말다툼까지 인다. 그걸 눈치챈 차승원은 일어나서 간단한 호른 연주을 선보인다. 상당한 실력의 연주, 박수까지 터져나온다. 그러나 알고 보니 시늉이다. 누군가 옆에서 불어주고, 차승원은 흉내만 냈다. 그럼 그렇지. 전날 차승원의 고백이 떠오른다. “금관악기는 음의 높고 낮음을 입술의 진동으로 연주해야 해요. 4개월 연습했는데 도레미파솔라시도 중에 두음 정도밖에 안 나더라고요.”
호른 연주와 평양 사투리보다 차승원은 “선호라는 한 인물의 역사”가 부담되는 모양이다. 그는 “<박수칠 때 떠나라>는 이틀 동안 벌어지는 이야기인 반면, <국경의 남쪽>에선 35년 동안 한 남자의 이야기가 펼쳐진다”면서 “단순하지만 힘있는” 뭔가를 보여주고 싶다고 말한다. “지금까진 자꾸만 뭔가를 만들어내야 했는데, 또 감독이 지금 상황이 어떻다고 하면 좀 다른 것을 보여주곤 했는데, 선호는 그렇게 접근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마지막 장면이 아직 남아 있다. 선호의 마음을 알겠는데, 과연 최선의 길을 선택하지 못했던 선호의 마음이 제대로 관객에게도 전달될까 하는 부담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전에 안판석 감독은 “한 인간이 앓고 있는 병은 세상의 병이기도 하다”는 말로 <국경의 남쪽>을 설명한 적이 있다. 영화는 선호의 남한 정착 과정을 보여주면서 휴먼드라마의 꼴을, 경주와 연화 사이에서 갈등하는 선호의 갈등을 보여주면서 멜로드라마의 꼴을 띠기도 하지만, 제작진은 어떻게 하면 개인의 아픔을 통해 사회가 갖고 있는 병을 온전히 드러내 보일 수 있을까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아직까지 놓지 않고 있다. 2월5일 촬영을 끝내고 4월 말 개봉예정인 <국경의 남쪽>은 북쪽에서 온 “에일리언 같은 인물 선호를 통해” 우리는 온전하고 멀쩡하다고 굳건히 믿고 있는 남쪽 사람들을 거꾸로 세울 수 있을까.
차승원 인터뷰
“보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나 없나 그게 관건이다”
촬영현장 공개 하루 전날, 숙소 근처에서 차승원을 만났다. 호른 연습 때문에 수면 부족 상태라며 1시간 눈 붙이고 왔다는 차승원은 “생맥주나 한잔하자”며 호프집으로 이끌었다.
-해쓱하다. 8kg이나 뺐다고 들었다. =살 뺀 이후로 체력이 많이 나빠졌다. 추위도 많이 타고 금방 피곤해진다.
-‘좋은영화’와 통합 전에 싸이더스쪽에 적잖은 손실을 입혔는데. =아, 싸이더스 영화랑 세번 붙어서 완승했지. (웃음) <지구를 지켜라!> 때 <선생 김봉두>가, <슈퍼스타 감사용> 때 <귀신이 산다>가, <혈의 누> 할 때 <남극일기>가.
-호른이랑 평양 사투리를 배우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둘 다 시간이 해결해주는 거다. 음이나 말이나 리듬에 내가 익숙해져야 가능한 거니까. <혈의 누> 때 말 타는 것도 그렇고. 호른을 가르쳐주신 분이 원래는 전공이 플루트였는데 그분도 처음엔 아무리 해도 소리가 안 나서 식음을 전폐했다고 하더라. 난 한달 하니까 소리가 났다. ‘뿍’ 하고. 조금 더 하면 연주도 가능하겠다 싶었는데, 그 다음부터는 제자리더라. 나중에 취미로 하라고들 하는데, 나랑은 안 맞는 악기다. 그래도 동작은 90점 정도는 된다고 본다. 평양 사투리는 억세진 않은 편이라 이게 사투리 맞나 싶을 거다. 남쪽에서 같은 지역 출신 사람들도 사람에 따라 말이 다르지 않나. 속도나 톤에 조금씩 내 감정을 넣어 배운 것을 변주해서 연기했다.
-시나리오의 어떤 점이 좋았나. =일상적이라 좋았다. 서른 넘은 한 인물을 2시간 안에 보여줘야 하는데 급하지 않더라. 일대기를 러닝타임으로 끊을 경우, 대개 자극적인 에피소드 위주로 잘라 붙여서 가지 않나. 이 시나리오는 그런 조급함이 없었다. 이 작품을 끝낸 뒤에도 선호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해할 것 같다.
-안판석 감독과는 <장미와 콩나물>에 출연한 뒤로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다. 현장에서도 서로 잘 챙겨주는 것 같던데. =남으로 온 연화와 하나원에서 만나는 장면을 찍을 때였다. 아주 괴로운 장면이었는데. 습관처럼 조감독은 슬레이트 대고 ‘준비 다 됐다’고 했는데, 감독님은 정작 준비가 돼야 할 사람이 아직 안 됐다고 하면서 시간을 주시더라. 영화가 협주곡이라는 걸 요즘 많이 느낀다.
-전작들과 캐릭터에 접근하는 방법 자체가 다르다고 했다. =테크닉의 문제가 아니다. 보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나 없나. 그게 관건이다. 1회성 연기 같은 걸 전에는 한 적이 있다. 그걸 무시하는 건 아닌데 나중에 보면 저건 아닌데 싶은. 이번엔 계산해서 뭔가를 보여주려고 안 한다. 그래선지 촬영이 없어도 내가 이 인물을 놓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안 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