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동네에 보따리장수 아주머니가 칠레산 과자랑 통조림 등속을 갖고 온 적이 있다. 동네 할머니들은 “칠렐레 나라가 어디냐?”며 궁금해했다. 우리는 사탕을 하나씩 물고 “칠래? 맞을래?” 까불었다. 막연하지만 그 나라가 꽤 칠렐레팔렐레 하리라 여겼다. 칠레가 관심 안에 다시 들어온 건 2004년 우리나라와 최초로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으면서다. 국회 비준동의를 앞두고 몸싸움이 이어질 즈음 “농민들 반대를 무릅쓰고 협정까지 맺었는데 왜 칠레산 와인값은 안 떨어지냐”고 성토하며 퍼마시다 급체한 일이 있다. 그러던 ‘나의 칠렐레팔렐레’가 이번엔 여성 대통령을 배출해 ‘지대로’ 놀랐다. 무신론자에다 미혼녀, 이혼녀 딱지를 붙인 중도좌파연합의 미첼레 바첼레트 언니가 우파 억만장자 기업인을 큰 표차로 눌렀다. 남미에선 직선 여성 대통령이 니카라과와 파나마에도 있었지만, 둘 다 대통령인 남편의 후광을 입은 이들이었다.
바첼레트는 피노체트 군정에 저항해왔고, 의사 출신으로 보건장관에 이어 남미 최초의 국방장관도 역임했다. 코스별, 단계별 과정을 알차게 거친 셈이다. 당선 일성은 “칠레가 한 여성을 대통령으로 뽑기에 앞서 20년, 10년 혹은 5년 전에 시민들은 그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감과 정체성을 잘 살린 말이다.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딸과 아들, 지지자들에 둘러싸인 그의 모습은 지구 반대편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지난해 부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에서 “정상들 부인들은 무슨 행사에 참가했다”는 보도가 나올 때마다 필리핀의 아로요 대통령과 뉴질랜드의 클라크 총리는 누가 따라왔나 싶었다. 이런 관습과 편견은 수많은 여성 정치인들을 둘러싼 ‘유리천장’과 ‘유리벽’이 아닐까. 7명의 여성 정상이 세계적으로 뛰고 있는 마당에, 한때 우리나라 ‘여성 대통령 1호’로 꼽혔던 분은 ‘잠자는 장외의 공주님’이 돼 누가 깨우러 오지 않나 기다리고만 계셔 답답하다. 자랄 때 친구들이랑 인형놀이를 ‘지대로’ 못 해봐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