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하 감독의 키는 무려 190cm에 달한다. 지난 1월14일 오후 8시, 서울 강남 모처에서 진행되는 <비열한 거리>의 촬영현장. 모니터와 카메라 앞을 쉴새없이 왕복하는 그의 실루엣은 멀리서도 눈에 띈다. 그러니 열혈단신(短身)의 기자가 감독의 분주한 행보를 따라잡기란 쉽지 않을밖에. 고층건물 앞에 주차시킨 승용차 운전석에서 병두(조인성)의 정면을 잡은 카메라의 앵글을 모니터로 확인한 감독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배우에게 향한다. 힘겹게 그 걸음을 쫓아가면, 카메라를 조금 높였으면 한다는 제안이나 방금 촬영한 테이크가 괜찮으니 다음 컷으로 넘어가자는 식의 다소 썰렁한(?) 멘트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커다란 덩치를 지닌 감독의 낮은 목소리는 갈수록 세기(細氣)를 더한다. 사랑하는 여자인 현주(이보영)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던 삼류조폭 병두가, 회사 상사인 이대리(김영필)와 함께 건물을 나서는 현주를 발견하는 장면. 병두가 어떤 타이밍에서 웃음을 흘리고, 눈빛이 흔들려야 하는지까지 체크하던 유하 감독은 급기야 배우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연출하기 위해 현주와 그의 상사를 카메라 뒤에 세우고 그들의 연기를 지도하기 시작한다.
인물의 감정과 관계된 컷을 다소 길게 촬영한 탓에, 저녁 무렵부터 대기하던 무술감독이 본격적으로 촬영에 합류한 것은 새벽 4시 무렵이었다. 불륜 관계를 정리하는 과정에 있는 두 사람의 승강이에 끼어든 병두는 이 대리에게 극악한 폭력을 행사한다. 스테디캠을 포함하여 카메라 2대를 가동한 이 장면은, 앞선 컷에 비하면 상당히 빠른 템포로 진행된다. 70여명의 조직폭력배가 벌이는 처절한 세력다툼 등 굵직한 액션 장면을 포함한 영화지만, 정작 감독은 “스펙터클은 드라마에서 나온다”고 믿는 까닭에 현란한 액션보다는 미묘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 더 많은 공을 들인다.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리얼한 액션을 선보였던 신재명 무술감독 역시 “길거리에서 마주칠 법한, 다듬어지지 않은 액션이 컨셉”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중요하게 표현되어야 할 것은 한 남자의 폭발 상황이며, 이런 식으로만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그의 슬픔이다. 그것은 거친 남성성을 강요당하고, 폭력을 내면화해야 했던 수컷의 슬픔이기도 하다. <말죽거리…>에서 마초가 만들어지는지는 과정을 고찰했던 유하 감독은 이제, 그 마초 혹은 조폭이 비정한 사회 속에서 어떻게 이용당하고 욕망을 좌절당하는지를 그릴 참이다. 병두는 자신이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조직의 뒤를 봐주는 ‘스폰서’의 위험한 거래에 응하면서 파멸해간다.
<말죽거리 잔혹사>에 이어 조폭 3부작 중 두 번째
<말죽거리…>의 PD였고, 현재 유하 감독과 함께 필름포에타를 책임지고 있는 최선중 PD(싸이더스FNH와 공동제작하는 <비열한 거리>는 필름 포에타의 창립작품이다)는 이 영화가 유하 감독의 조폭 3부작 중 <말죽거리…>에 이어 두 번째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잠시도 가만 있지 못하는 탓에 카메라와 모니터가 조금이라도 멀면 짜증을 내고, 예정된 콘티가 10컷이면 실제 촬영 분량은 그 2배에 달하게 되는 등 유하 감독의 습성을 꾀고 있는 최선중 PD에 의하면, “그의 가장 큰 장점은 반성하는 감독이라는 점”이다. 과연 <말죽거리…>에서 남성성에 대한 매혹과 반성을 동시에 보여줬던 유하 감독은, <비열한 거리>에 이르러 그 공존을 한층 심화한다. 극중 병두의 친구인 영화감독 민호(남궁민)는 병두의 은밀한 일화를 영화로 옮겨 친구를 위기에 빠뜨리는데, 관계자에 의하면 민호의 비열함이 촬영을 거치면서 한층 더해졌다고. “실제로 조폭 취재를 하다보니까 감독, 그러니까 먹물들이 가장 비열한 인간임을 느꼈다”는 그는, 민호가 자신임을 숨기지 않는다. 자신이 매혹된 병두의 이야기를 다시 이용하는 민호는, “민호로 인해 이 영화가 약간 장르영화의 메타드라마적 속성을 지니게 됐다”는 그의 모습과 닮았다. 또한 이 영화에서 새롭게 더해진 감독의 화두는 식구. 여기서 식구란 피를 나눈 가족뿐 아니라 병두가 책임지는 조직의 동생들까지 의미한다. 이른바 조폭영화에서 출발한 <비열한 거리>가 <대부> <좋은 친구들> 등의 갱스터물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처음으로 2.35:1의 화면비율로 영화를 찍고 있는 유하 감독의 현장모니터는 25인치 평면 TV다. 그는 매 테이크를 찍을 때마다 커다란 모니터에 바짝 붙어 프레임 곳곳을 살핀다. 스스로는 “감정의 디테일은 자신있다”고 말하지만 그의 디테일은 비단 인물의 감정과 드라마에서만 발휘되는 건 아니다. 그는 액션 장면에선 미묘한 컷포인트에 의거해 카메라의 무빙을 지적하고, 원경으로 지나가는 버스 옆 부분에 붙은 영화의 포스터까지 문제삼는다. 대사의 뉘앙스는 물론이고, 억양과 사소한 동작의 타이밍까지 지시하는 감독의 요구에 배우들 역시 어려움을 토로할 만하다. 그러나 디테일한 연출이 이젠 편하게 느껴진다는 조인성은 “병두가 그저, 멋있는 조인성처럼 보일까봐 걱정했는데, 중간에 모니터링을 해보니까 병두가 불쌍해 보였다”며 만족감을 표한다. 자신의 태생과 위치에 대해서 쉽게 변명하지 않는 유하 감독은, 사회 속 먹이사슬의 가장 밑바닥에 위치한 조폭의 운명을 진심으로 연민하면서도 자신이 창조한 인물을 끝까지 파멸로 몰고 갈 모양이다. 그 자세한 내막은 오는 여름에야 확인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그것이 인정사정 볼 것 없고, 그럼에도 여전히 매혹의 시선을 거두기 힘들 것이라는 예상은 어렵지 않다.
유하 감독 인터뷰
“유신시대 교육 탓인가, 조폭성과 집단적 폭력성에 관심이 많다”
-<말죽거리 잔혹사>에 등장하는 현수, 우식, 선도부장 중 한명의 미래에 대한 영화가 아닐까 생각했다. =<말죽거리…> 이후 장르영화, 심화된 남성영화를 해보고 싶었다. <말죽거리…>의 미래라기보다는, 아이템이 발전됐다고 보는 게 맞다. 현수가 쌍절곤으로 상대의 뒤통수를 내리치는 장면이 조폭이 탄생하는 순간이라면, 이 영화는 탄생된 조폭이 어떻게 소비되고 기능하는지를 얘기할 것이다.
-왜 하필이면 조폭인가. =억압적인 유신시대 교육을 받으면서 거친 남성성이 많이 각인돼서 그런지, 속칭 조폭성 혹은 집단적 폭력성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여기서 조폭은 삶의 알레고리에 불과하다. 병두가 30대 소시민 가장이라면 그 역시 상사의 뒤통수를 치고, 누군가의 눈치를 보면서 비루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테니. 남성성에 대한 반성뿐 아니라 식구, 가족에 대한 화두가 중요한 고민 중 하나였다.
-다른 조폭영화와의 차별되는 지점이 있다면. =학원물인 <말죽거리…>가 디테일로 차별성을 뒀다면, 이 영화는 가치평가를 미리 내리지 않은 상태에서 객관적으로 다루려 했다. 여기에 영화감독이 등장하는 지점에서, 장르영화의 메타드라마적 속성도 드러난다.
-묵직한 액션이 많이 등장할 텐데, 액션의 컨셉에 대해 설명한다면. =이 영화 속 모든 액션은 드라마에 복무해야 한다는 면에서, 액션영화라고 부르는 건 적절치 않다. 굳이 설명하자면 <말죽거리…>처럼 리얼 액션일 것이고, 아무래도 사시미를 들고 왔다 갔다 하니까 좀더 세게 느껴지긴 하겠지.
-소심한 모범생으로 권상우를 캐스팅한 데 이어서, 이번에 조인성이 병두를 연기하는 것도 다소 의외다. =처음에 생각했던 병두의 이미지는, 스물아홉이지만 인생을 너무 많이 산 곰삭은 인물이었다. 그러다가 조인성을 만났는데, 비열해 보이면서도 선함이 공존한 눈이 맘에 들었다. 조폭과 언뜻 매치가 잘 되지 않는 꽃미남이라는 점에서 모험정신을 자극했다.
-마틴 스코세지의 <비열한 거리>(Mean Street)와는 어떤 연관이 있나. 영어제목은 <A Dirty Carnival>이던데. =원래 생각했던 제목은 <비루한 것들의 카니발>이었다. 죽음과 잔치가 한 몸에 있는 카니발과, 매혹과 반성 사이에 위치한 이 영화는 서로 연결된다. 하지만 아무래도 관객 100만명을 쫓는 제목이라서. (웃음) 마틴 스코세지 감독의 <비열한 거리>와는 무관한 영화지만, 그의 영화 중 <좋은 친구들> 등을 굉장히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