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는 펜 아닌 컴퓨터만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든 적이 없다. 폭스가 <아이스 에이지>를, 드림웍스가 <슈렉>을 만들어 디지털 장편애니메이션 시장 공략에 나설 때 디즈니한테는 존 래세터가 이끄는 아이디어 집단 픽사 스튜디오가 있었다. 그러나 픽사가 느끼는 디즈니와의 계약 내용은 불합리했고, 마침 애플사에서 쫓겨난 스티브 잡스가 픽사 스튜디오의 CEO 자리에 앉으면서 적극적인 투자 전략으로 사세 확장에 성공하자 픽사는 완전하게 디즈니와 이별을 고한다. 스티브 잡스는 올 여름 존 래세터의 <자동차>가 디즈니를 통해 배급되는 픽사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고 한 바 있다.
<치킨 리틀>은 디즈니 최초의 자체 제작 CG 장편애니메이션(혹은 흔히 말하는 3D 장편애니메이션)이다. 전통적인 방식이 아닌 순수 디지털 영화를 디즈니가 드디어 내놓는 까닭은, 픽사와의 협업으로 갱신할 수 있었던 애니메이션 왕국의 이미지를 지속, 발전시키려는 뜻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치킨 리틀>은 픽사 없는 디즈니의 잠재력을 가늠해볼 수 있는 첫 번째 근거가 되는 셈이다.
치킨 리틀(잭 브라프)은 건장한 수탉의 풍채를 가진 아빠 벅 클럭(게리 마셜)과 달리 쪼그마한 몸집에 딱히 가진 재주도 없는 별볼일 없는 닭이다. 엄마를 일찍 잃고 아빠와 단 둘이 사는 치킨 리틀은, 하늘에서 떨어진 도토리를 머리에 맞고 “하늘이 무너지려고 해요!”라고 동네방네 외치고 다녔다가 마을 전체를 혼란에 빠트리고 만다. 어이없는 해프닝으로 부자간에 불신과 서운함이 교차한 뒤 1년. 치킨 리틀은 마을 야구팀에 가입해 대회에 나갔다가 운 좋게 승리의 주역이 된다. 집안의 경사를 계기로 아빠와 화해의 물꼬를 트려는 찰나, 치킨 리틀은 또다시 하늘에서 떨어진 무언가로 머리를 맞는다. 1년 전의 기억이 되살아난 치킨 리틀은 그때보다 더 크고 확실한 사건임에 분명한 이 일을 아빠에게 말하지 못하고 돼지 런트(스티브 잔), 청둥오리 애비(조앤 쿠색), 물고기 피쉬에게 알린다.
CG 장편애니메이션 세계에 직접 발을 들이게 된 디즈니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치킨 리틀>의 기술은 ‘스쿼시 앤드 스트레치(squash and stretch) 애니메이션’, 즉 찌그러지고 늘어나는 움직임을 표현할 수 있는 툴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시각효과 슈퍼바이저 스티브 골든버그의 말에 따르면 ‘스쿼시 앤드 스트레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추구해온 고전적인 움직임 원리다. <치킨 리틀>의 캐릭터들과 사물은 오래전 미키 마우스나 도널드 덕이나 구피처럼 고풍스런 스타일로 움직인다. 유체 운동을 하듯 팔다리가 흐느적거리고, 일직선 방향으로 퓽 튀어나가기보다 두발을 구르며 갈지자로 내달리는 것이다. CG 애니메이션에 적용된 이같은 움직임 원리는, 마치 토크쇼가 대세인 시대에 스탠드업 코미디를 보는 느낌을 준다.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부드러우면서도 셀애니메이션 시대의 과장이 섞인 움직임을 디지털화함으로서 디즈니는 첫 CG 장편애니메이션에 기술적 야심을 실현해 보이고 있다.
그러나 영화의 테크놀로지는 스토리의 힘이 받쳐주지 않으면 맹목적 과시에 그칠 수밖에 없다. <치킨 리틀>의 스토리 아이디어를 낸 감독 마크 딘달의 원안은 “멋쟁이 동물들이 뷰티 콘테스트에 나가고 없는 사이, 마을에 남겨진 천덕꾸러기 농장 동물들이 지구를 정복하려고 온 외계인들과 맞서 싸운다”는 내용이었다. 약자 혹 아웃사이더에 대한 따뜻하고 긍정적인 시선에서 출발한 <치킨 리틀>은 부자 사이의 갈등을 의외로 쉽게 해결하고 <우주전쟁>을 패러디한 스펙터클로 이어간 다음 다소 허황된 유머를 덧대어 축제를 벌이듯 성장드라마의 결론을 내린다. <슈렉>의 촌철살인적인 패러디 감각이 요긴하리라 느낀 모양인지, <치킨 리틀>은 M. 나이트 샤말란의 <싸인>의 패러디 시퀀스도 보여준다. 이유없는 패러디는 스토리의 앙상한 뼈를 드러낸다. 치킨 리틀이 야구대회에서 거두는 뿌듯한 승리의 에피소드나 치킨 리틀과 그의 친구들이 우주선 안에서 겪는 에피소드 등 제법 디테일하고 감각적으로 구성된 전반부의 시나리오는 후반부에서는 느슨해진다. 자연스럽게 폭소를 유도해내는 대목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귀엽고 앙증맞은 캐릭터들의 매력이 없었다면 이 소동극은 전혀 조여지지 못했을 것이다. 까만 눈동자에 섬세한 표정 근육을 가진 치킨 리틀, 사랑스럽게 웃는 피쉬, 기괴하면서도 귀여운 꼴의 외계인 등 <치킨 리틀>의 아기자기한 캐릭터 디자인은 관객의 시선을 강하게 붙들 만한 매력을 갖고 있다. 이 캐릭터들의 디자인은 기본적으로 디즈니의 전통적인 만화체를 연상시킨다. 여기에 스쿼시 앤드 스트레치 애니메이션 원리가 더해지면서 캐릭터 애니메이션으로서 <치킨 리틀>은 디즈니 애니메이션만의 개성을 최대한 부각시키는 데 성공했다. 부자관계 회복을 통한 열등아의 성장담도 지금처럼 표면적이지 않고 더 큰 공감과 울림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면 <치킨 리틀>은 감성적이면서 복고적 스타일을 지닌 디지털 애니메이션의 매력을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치킨 리틀>은 지난해 5월6일, 아흔일곱 번째 생일을 앞두고 사망한 디즈니 스튜디오의 아티스트 조 그랜트에 대한 헌정의 의미를 가졌다고 한다. <덤보>의 각본가였고 <환타지아>를 연출한 조 그랜트는 1933년부터 디즈니와 일해왔으며 <치킨 리틀>의 프로듀서 랜디 풀머의 표현에 의하면 “월트 디즈니의 전설은 기술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뛰어난 캐릭터가 만들어내는 뛰어난 스토리텔링에 있다고 말하곤 했던 사람”이다. 조 그랜트에 대한 헌정 영화는 다음으로 기약했어도 나쁘지 않았을 성싶다. <치킨 리틀>은 지난해 11월6일 미국 개봉 때 <해리 포터와 불의 잔> <폴라 익스프레스>처럼 일부 아이맥스관을 통해 3D 입체영상 버전으로도 상영됐다. 이를 위해 ILM 스튜디오 인력이 별도 투입돼 기술 작업을 했다고 한다. 픽사와의 결별로, 디즈니는 단지 CG로 그림 그리는 손만 잃었다고 생각한 것일까. 장난감, 몬스터, 열대어, 슈퍼 히어로 그 무엇이 되었건 평범하지 않은 소재로 만인의 공감과 흥미를 이끌어낼 줄 아는 뛰어난 스토리메이커 집단의 빈자리는 아직 메워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