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규정하는 것은 늘상 붙여진 이름이며 소속한 사회와 살아온 이력을 드러낸다. 유명인일수록 행동거지가 더욱 조심스러운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름을 감추고 얼굴을 가리면 종종 내면의 솔직함이 드러난다. 깊이 가라앉아 있던 순수한 본심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익명의 공간은 인간 성악설에 논거를 더한다. 복잡다기한 현대사회에서 늘어나는 익명의 공간은 인간의 폭력적 본성을 증폭시킨다.
‘(나를 그리고 내가) 모르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상처입은 현대인의 이중적인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한 드라마가 14일 밤 방영됐다. 문화방송 <베스트극장> ‘타인의 취향’(소현경 극본, 유정준 연출)이다.
산에서 조난당해 우연히 만난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한 주인공 강민주(김지우)는 폐소공포, 대인기피 등 심각한 후유증을 겪는다. 서유진(이필모)은 산행 중 동굴에서 만난 민주에게, 익명의 공간에서 느낀 범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치유하지 못할 상처를 남긴다. 시간이 흘러 민주는 가해자가 너무나 평범한 회사원이었음을 확인하고, 평범함과 익명의 폭력성 사이에 깊은 혼란을 느낀다. 민주는 익명의 만남을 미끼로 유진을 이끌어 같은 장소에서 처절히 복수한다.
몇몇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보기 드문 수작이었다. 소재와 주제의 깊이와 참신성뿐 아니라, 극적 완성도나 적절한 연출력이 단막극의 장점과 잘 결합됐다. 인간이 익명의 가면을 쓰는 순간 드러나는 폭력성과 또 다시 익명의 복수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처받은 인간의 한계에 대한 성찰이 돋보였다.
섬세한 심리 묘사에 힘 쏟은 연출은 극의 완성도를 드높였다. 창 밖에서 혹은 거울에 비추는 방식으로 훔쳐보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는 한편, 화면은 간간히 흔들리고 얼굴은 클로즈업 되면서 긴장감은 극대화됐다. 전반적으로 어두운 톤은 주인공 민주의 깊은 상처와 불안한 심리, 분노와 복수심을 잘 드러내줬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과정이 어색한 단절없이 표현되고 긴장이 높아지는 순간마다 맞춰 흘러나온 배경음악 등도 시너지 효과를 낳았다.
생략과 압축, 여백 등 단막극의 장점을 극대화하며 한편의 단편 심리 소설을 보는 듯한 재미를 선사함과 동시에 익명에 감춰진 현대인의 이중성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기회까지 마련했다.
다만 스타급 연기자들이 기피하는 단막극인 탓에, 일부 신인 연기자들의 어설픈 연기는 가끔 극 몰입을 방해했다. 인물의 섬세한 표정 연기가 심리물의 완성도를 상당 부분 결정짓는다고 할 때, 때때로 어색한 눈빛과 발음은 작지 않은 흠이 되기도 한다. 심리물에서 흔히 쓰이는 효과음이 과도하게 쓰이면서 긴장감을 강요해 되레 극적요소의 반감으로 이어지지 않았는지도 의구심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