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빵사 노인 네스토(에밀리오 구티에레즈 카바)는 아내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져 산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그를 위해 딸과 사위는 밤새 영화를 볼 수 있도록 위성채널을 달아준다. 그런데 밤마다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온통 야한 영화뿐이다. 점잖던 노인은 어느새 매일 밤 텔레비전 앞에 앉아 수음하는 것이 일이 되고 만다. 때마침 마리벨(잉그리도 루비오)이라는 아가씨가 점원으로 일하게 되고, 네스토는 그녀에게 마음을 뺏긴다. 마리벨은 푼돈이나 벌기 위해 몸을 팔며 청춘을 보내지만, 늘 발칙하고 도발적인 것을 사랑하고 꿈꾸는 여자다. 그녀는 어느 날 마놀로(알베르토 산 후안)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마놀로는 토끼 옷을 입고 채무자를 쫓아다니며 망신을 줘서 돈을 받아내는 소극적인 수금원이다. 그러나 마리벨을 만난 그날만은 과격하고 충동적인 면모를 보여주어 마리벨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마침내 마리벨은 연애는 마놀로와 결혼은 네스토와 한다. 이때부터 네스토, 마리벨, 마놀로 세 사람의 삶은 얽히고 또 변한다.
네스토로 시작한 영화는, 마리벨로 옮겨가고, 마놀로로 옮겨간다. 혹은 마리벨이라는 존재와 그녀의 욕망이 네스토와 마놀로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놓는다. 네스토는 평생을 안정적이고 평온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지만, 그녀를 통해 욕망의 화신이 된다. 마놀로는 그녀와의 사랑이 안정적인 가정으로 이어지기를 바라지만, 끝내 그것은 그녀와의 홍역 같은 사랑 다음에야 찾아온다. 이를테면, 네스토와 마놀로에게 마리벨은 삶의 촉매제 역할을 한다. 반면에 마리벨 자신도 욕망의 결을 따라 끊임없이 충동적으로 살고 싶어한다. 그래서 범죄도 거짓말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녀는 결국 자기의 욕망을 따라 또 어디론가 흘러간다.
누구도 정해진 삶은 없다는 것이 이 영화가 말하고 싶어하는 바다. 그런 점에서, <죽여주는 여자>는 분위기에서도 유쾌함과 황량함이 손을 잡고 춤을 추는 불균질한 윤무의 영화다. 전체적으로 틈이 많고 비약이 심하지만, 한편으론 그 때문에 과장과 소란을 앞세우는 스페인영화 특유의 매력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말하자면, 삶의 모호함에 대해 치기의 힘으로 질문하는 스페인식 소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