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게 물든 쑤저우강을 꿈꾸는 듯한 얼굴로 헤엄치던 인어가 있었다. 밤이면 그 인어는 싸구려 술집의 불빛 아래 쇼를 펼치며 사람들 사이로 스며들고 싶어했다. 1인칭 시점을 포기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멜로드라마 <수쥬>에서 바다를 유유히 헤엄치던 여배우 주신. 진가신 감독의 새로운 뮤지컬영화 <퍼햅스 러브>의 홍보차 한국을 방문한 주신을 삼성동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숙소의 라운지에서 만났다. 절강성 출신이며 1976년생인 주신은 외동딸로 자랐고 어린 시절부터 도드라진 영화광이었다. 그녀는 극장관리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유년기 대부분을 교실보다는 극장에서 보냈다. 그때만 해도 주신은 “매일 극장 맨 앞줄에서 바보처럼 고개를 젖히고 영화를 보던” 남자아이 같은 악동이었다고 한다. 항저우 예술학교에서 무용을 전공한 그녀는 2학년 때부터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몇번의 단역을 거친 주신이 주목받기 시작한 계기는 첸카이거 감독의 <시황제 암살>을 통해서였다. 자객 형가9장풍의 인생을 순식간에 바꿔놓는 눈먼 소녀 역할은 비중은 작지만 주신이라는 배우의 존재를 강하게 느끼도록 한 캐릭터였다.

로우예 감독의 <수쥬>는 그녀를 기대주에서 대륙의 대표적인 여배우로 탈바꿈시켰다. “로우예 감독이 사진을 보고 나를 찾아와서 시나리오를 건넸다”고 주신은 영화 출연동기를 밝혔다. 1인2역이라는 새로운 시도를 위해 그녀와 감독은 촬영 전 1주일 내내 시나리오를 분석하는 데 모든 시간을 할애했다. “정작 촬영에 돌입해서는 로우예 감독은 나에게 어떤 특별한 요구도 하지 않았다. 전적으로 스스로 캐릭터를 찾는 방식이었다”고 주신은 기억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작업하는 것처럼 편안하게 진행된 <수쥬>는 2000년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한국에 선보였다. 왕샤오솨이의 <북경자전거>를 거친 주신은 프루트 첸의 <할리우드 홍콩>과 프랑스에 살고 있는 중국인 소설가 겸 영화감독 다이시지에의 <소재봉>에 출연하며 화어권 영화 전체로 눈을 돌린다. 그리고 “전작들에 깊은 감명을 받고 다른 작품을 논의하기 위해” 만난 진가신 감독에게서 <퍼햅스 러브>의 여주인공 손나 역을 제안받는다. 무용을 전공했고 몇장의 정규앨범을 내놓은 주신에게 35년 만에 홍콩에서 만들어지는 뮤지컬영화가 맡겨진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처럼 보인다. “진 감독은 언제나 새로운 장르를 모색해왔다”고 이야기하는 그녀는 춤 연습과 더불어 <퍼햅스 러브>에서 거꾸로 매달린 장학우를 잡고 버티는 장면을 위해 촬영 내내 악력을 키워야 했다.

주신은 “손나는 빅스타이지만 현실적이기 때문에 지엔(금성무)을 만났을 때 별볼일 없는 상대로 여기고 차갑게 대한다. 하지만 그러한 그녀에게도 인간적으로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존재한다. 과연 그것이 스스로가 생각하는 대로 가늠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바로 <퍼햅스 러브>”라고 말한다. 허스키하고 낮은 음성으로 “나도 여자지만 여자들은 대부분 귀찮고 번거로운 성격인 것 같다”고 말하는 주신의 일상적 모습에는 손나의 냉정함과 강인함이 실루엣처럼 드리워진다. 진가신 감독의 연기 지도나 다른 현장 스탭들 행동을 그대로 흉내내며 당시 상황을 신나게 설명하는 주신의 발랄함에는 영화 후반부에 지엔과의 사랑을 되찾아가는 손나의 천진함이 묻어난다.

절강성 어느 극장에서 눈을 반짝거리며 스크린을 향했던 소녀는 이제 “등이 켜지고 스탭들이 움직이는 장면 자체와 액션이라는 구호를 너무도 사랑하는” 서른살의 여배우로 자라났다. 인형처럼 투명한 피부에 깡마른 몸매를 가진 주신은 진지한 얼굴로 “<퍼햅스 러브>의 버스광고를 홍콩에서 처음 발견하고는 슬퍼졌다. 이제는 작품이 끝날 때마다 그렇게 내 안의 무엇인가를 잃는 듯한 상실감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배우는 감독의 생각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다리 같은 존재”라고 말하는 그녀는 현재 중국 최고의 흥행감독으로 평가되는 펑샤오강의 신작 <예앤>에 출연 중이다. 내년에는 “<퍼햅스 러브>와는 반대로 현실적인 성공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칭위”를 연기하는 주신을 우리는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