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그가 나타났다. 여전히 더벅머리에 순한 눈동자. 아직도 열쇠가 잘 맞지 않는 옥탑방에 살고 있으며, 지금도 누군가와 주절대는 버릇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동안 무얼 하고 지냈냐니까 싱긋 웃는다. 변하지 않은 그를 보면서, 변한 우리가 던질 만한 질문이 아니었던 게다. 장경섭도 그의 분신인 <장모씨 이야기>도 그때 그 모습 그대로이다. 달라진 게 있다면 그가 누군가의 손, 우리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벌레의 손을 잡고 있다는 정도다.
1990년대 중반, 대한민국 만화계에는 언더 혹은 인디라는 젊은 기운이 용솟음친 적이 있다. 그중 <화끈>에 연재된 장경섭의 <장모씨 이야기>는 단연 발군의, 적어도 나의 기준으로는 세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의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화면 안에 절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수봉이 형과의 독특한 대화법, 작가의 분신인 주인공을 다시 여러 분신으로 나누어 서로 자조하고 위로하게 만드는 복합적인 연출법 등은 ‘장경섭표 만화’를 우리 머리에 분명히 각인시켰다. 그 장모씨가 10년이 가까워진 지금에야 새로운 연작을 완결시키며 <‘그’와의 짧은 동거>라는 단행본으로 나타났다. 2005년의 마지막을 맺는 가장 반가운 소식이다.
그때 그 옥탑방에 아직 살고 있는 장모씨는 바퀴벌레와의 길지 않은 동거 생활을 고백한다. 어느 날부터 그의 방에서 살고 있던 바퀴는 식사 준비와 설거지로 알뜰히 살림을 챙기고, 그의 낚시 길에 동행하고 즐겁게 스티커 사진을 찍으며 훌륭한 동거인이 되어간다. 무엇보다 장모씨의 둘도 없는 말 상대가 되어준다(장모씨는 의외로 수다쟁이다). 그러나 장모씨에게 여자친구가 생기고, 바퀴가 무성생식으로 뜻하지 않은 자손을 퍼뜨리고, 불륜에 빠진 사마귀가 살인범으로 몰려 곤충과 인간 사이의 싸움이 격해지면서, 둘은 서로간의 부정할 수 없는 간격을 확인해간다. “그러면 그냥 이야기를 하지 그랬어?” 바퀴가 방 안 곳곳에서 발견했다고 내미는 그 ‘무엇’을 바라보며, 장모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이건 무슨 뜻이지? 이젠 끝인가?”
단행본은 연작 시절의 ‘내적 토로’를 벗어나 좀더 넓은 차원의 문제를 다룬다. 외국인 노동자처럼 사회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곤충과 그들을 깔보는 인간의 대립, 비주류가 겪어야 하는 주류 중심 사회의 구조적인 억압, 본능에 따른 무분별한 번식의 참담함과 같은 은유의 메시지들은 다소 파편적으로 전달된다. 그러나 바깥의 이야기들이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그 전체를 아우르는 장모씨의 정서만큼은 10년 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숲속의 개울처럼 맑고도 한결같다. 장모씨가 인용하는 책과는 달리 나는 “세상에는 (보편적 인간에게) 나쁜 벌레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인간이다. 하지만 장모씨는 참 좋은 벌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