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덜 쓰는 말이지만 의식화라는 표현을 자주 쓰던 때가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면 선배들이 의식화 교육을 시키고 의식화 교육을 받으면 빨갱이가 된다고 겁을 줬다. 요즘엔 전교조가 예전에 대학 선배들이 하던 일을 떠맡았는지 전교조가 학교를 접수할 거라며 사학법 반대투쟁을 벌이는 분들이 많다. 그때나 지금이나 의식화는 절대 안된다는 입장이다.
의식화의 반대말은 뭘까? 무의식화? 그렇진 않을 것이다. 대개 의식화란 공산주의 의식화라는 표현을 줄여 부른 말일 텐데 굳이 줄여 부르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의식화라는 단어가 적과 우리편을 가르는 결정적 잣대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의식화 이전은 순수한 백지 상태, 의식화는 백지를 붉은색으로 도배한 상태, 이런 식으로.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의식화 이전엔 순수했던 인간이 의식화로 인해 오염된 인간이 된다는 얘기다. 의식화는 나쁜 것, 뭔가 작위적이고 음모론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것, 이라는 이런 논리는 독재와 파시즘을 유지하는 데 좋은 환경을 제공해왔다. 물론 의식화라는 말을 쓰는 데는 또 하나 중요한 이유도 있다. 앞에 공산주의라는 말을 없앰으로써 의식화는 무조건 공산주의라는 연상작용을 불러일으킨다. 지배자에 대항하는 수많은 의견과 주장을 무조건 한데 묶어 빨간색이라고 매도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았는지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아마 황우석 사태에도 이런 공식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자 황우석에게 검증의 칼을 들이댄 <PD수첩>에 주류언론들이 경기를 일으킨 이유는 무엇일까? 대중이 의식화 이전 상태에 머물길 바라는 것은 꼭 과거의 독재정권만은 아니다.
장황한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이번호에 실린 이준익 감독의 인터뷰에서 그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언급한 대목 때문이다. “2300년 전에도 극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사상이 있어야 한다고 외쳤는데 21세기에 영화를 찍으면서 사상도 없이 한다는 건 영화를 존경하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더 깊어졌지.” 영화엔 사상이 있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주의깊게 들을 필요가 있다. 영화가 어떤 메시지를 주입하는 도구라는 말로 읽혀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의 말은 사상이 없는 영화란 없다는 뜻으로 읽혀야 한다. 사상을 의식하지 않고 찍으면 순수한 영화가 나오는 게 아니라 주류이데올로기에 푹 절은 뻔한 영화가 나오기 때문이다. 흔히 주의니 사상이니 난 모른다, 난 오락영화를 찍는다는 감독들이 있는데 그런다고 순수 영화(이런 말이 가능하긴 할까?)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매 순간 선택을 하는 작업인 감독에게 사상은 당연한 요구사항이다. 예를 들어 <광식이 동생 광태>를 만든 김현석 감독이 “난 길이 험하면 가지 않는다는 주의다”라고 말할 때, 거기에도 사상은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감독이 불온한 사상을 품을수록 영화가 재미있어질 가능성은 커진다. 반대로 사상이 없는 영화를 만든다는 감독은 그 사상이 심히 의심스럽다. 남들과 똑같은 이야기라면 구태여 영화로 만들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사상에 오염된 우리에겐 언제나 의식화할 사상이 필요하다.
새해 첫호를 여성감독 기대주 4인으로 장식했다. 김선민, 박은영, 송혜진, 이경미 등 네 감독은 개성있는 단편영화로 주목받은 인물들이다. 그들의 영화에 들어 있는 사상이 흥미로운 것은 물론이다. 우리는 사회의 비주류에 속하는 여성감독들로부터 2006년 영화계의 희망을 보고 싶었고 그들은 그에 합당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소박하지만 다부진 그들의 말은 <씨네21>의 새해 인사를 대신할 만한 것이다.
P.S. 오정연 기자와 문석 기자가 오픈칼럼에서 밝힌 대로 9년간 <씨네21>에서 일했던 박은영 기자가 이번주를 끝으로 <씨네21>을 떠난다. 누구보다 그녀와 함께 일했던 시간이 길었던 탓에 앞으로 없다는 게 실감이 안 난다. 예전엔 그만두겠다는 후배들에게 직장생활만큼은 <씨네21>에 있는 게 더 행복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이번엔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행복이 이곳에만 있을 거라는 걸 그녀도 나도 믿지 않는 나이가 된 것이다. 그저 수고했다고 다독이고 싶다. 언젠가 다시 돌아오리라 믿으며 그녀의 새 출발에 행운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