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깜짝할 사이,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100m 전부터 가이드가 왼편을 주시하라고 했건만, 남과 북을 가르는 자그마한 비석을 맨눈으로 포착하기란 불가능했다. ‘드디어 북이구나!’라는 실감은 외려 2km의 비무장지대를 지나 금강산 북쪽 출입국사무소를 눈앞에 두고 뒤늦게 왔다. “껌은 잠시 입천장에 붙여두세요!” 가이드는 사진을 찍지 말라는 주의와 함께 입국조사 때 껌을 질겅거리고 있다가는 “북쪽 검사원 동무들의 눈총을 받기 쉽다”며 신신당부한다. 책과 휴대폰은 그렇다치고 껌 씹을 자유도 없나, 싶었는데 가이드는 그게 ‘최소한의 예의’라고 덧붙인다.
외금강에서 기암이 병풍처럼 이어진 절벽은 군사시설이 있다는 이유로 촬영 금지 구역이다. 절벽을 배경으로 배우 오윤홍을 찍으려 하자 북쪽 기관원이 막아섰다.
내려서 보니, 간이 출입국사무소 옆 도로엔 흔한 바리케이드 하나 없다. 붉은 깃발을 든 한명의 초병만이 도로 중앙을 막고 서서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먼저 입국하려고 서두르는 남쪽 관광객들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초병의 눈빛이 가끔 흔들리는데, 형형색색의 남쪽 관광객들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라기보다는 혹한을 견뎌야 하는 고통 때문인 듯하다. 금강산 관광이 가능해진 지 벌써 7년째. 숙소인 해금강호텔로 가는 길에 가이드는 남쪽 사람들을 멀리서라도 훔쳐보기 위해 담벼락 위로 머리를 내밀던 인근 주민들의 호기심도 이젠 가라앉았다고 전한다.
2006 남북영화인대회의 사전준비 성격 강해
서둘러 떠나온 탓에 미처 몰랐는데 숙소를 배정받기 위해 기다리는 이들을 헤아려보니 방문단 규모가 크게 줄었다. 지난 12월21일, 영화진흥위원회와 현대 아산이 마련한 ‘영화인 금강산 참관 행사’에 참여한 이들은 모두 37명. 50여명 규모의 방문단이 이처럼 줄어든 까닭은 2박3일의 방문 기간 동안 북쪽 인사들과의 만남이 불가능하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북쪽의 12월은 한해를 결산하는 총화 시기라서 관련 인사들이 금강산쪽으로 이동해 만남을 갖기가 어렵다고 한다. 일정을 훑어보니, 2차례의 내부 간담회를 제외하곤 일반인들의 금강산 관광투어와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영진위가 일정을 미루는 대신 영화인들의 방북을 예정대로 추진한 까닭은 뭘까. 영진위 안정숙 위원장을 비롯해 남쪽 영화인 대표 6명은 10월29일 방북하여 남북영화교류추진제안서를 전달하고, 교류 창구를 북쪽의 민족화해협의회로 단일화하는 데 합의한 바 있다. 기대에 미치진 못했지만, 지난해 조문 파동 이후 뚝 끊겼던 북쪽과의 교섭로를 다시 확보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의미가 있었다. 영진위 관계자는 “2006년쯤 남북영화인대회를 평양 혹은 개성에서 여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는데, 북쪽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면서 “이번 영화인들의 방북은 내년 행사의 사전 준비”라고 설명했다.
영화인들 입장에서도 이번 금강산 참관이 그저 눈요기를 위한 일정만은 아니었다. 방북 둘쨋날, 금강산을 둘러보고 평양 교예단 공연을 관람한 뒤, 나우필름의 이준동 대표는 천재 무용가 최승희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를 준비 중이라면서 “최승희가 월북한 1940년대를 그리려면 엄청난 세트 제작이 필요해 북쪽 현지 로케이션에 희망을 걸고 있다”고 기대했다. <압록강은 흐른다>로 잘 알려져 있는 소설가 이미륵의 생애를 담을 프로젝트를 계획 중인 조이슈즈의 서현석 대표도 “황해도 해주 출신인 이미륵 선생의 유년 시절을 찍으려면 현지 로케이션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서 대표는 북쪽과 공식 교섭 통로를 찾는 데만 1년 가까이 걸렸고, 그 사이 대남사업 일꾼이라며 자신에게 접근한 브로커가 적지 않았다고 어려움을 털어놨다.
그러나 기대만큼 앞으로 넘어야 할 난관도 적지 않은 듯했다. 영진위 남북영화교류추진 특별위원회 위원으로 북쪽 작가 홍석중의 소설 <황진이>의 판권을 구입하는 데 조력한 신동호 시인은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쪽은 남북 관계를 6·15 시대라고 부른다”면서 “6·15 정신에 부합되지 않는 영화에는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입장을 북쪽이 내보였다고 말했다. 한때 북한 현지 로케이션을 추진했던 <국경의 남쪽>만 하더라도 수차례 시나리오를 보여달라고 해서 결국 탈북자에 관한 영화라고만 간단히 소개를 했는데, 강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는 게 신 위원의 설명이다.
합작이 아닌 로케이션의 경우에도 북쪽은 경제적, 기술적 원조와 더불어 시나리오 작업부터 함께하길 원하고 있다. 이러한 방침을 고려하면 실질적인 남북 교류는 쉽지 않아 보인다. 새 영화 제작을 위해 북한 전쟁사료가 필요한데 확인할 방법이 없어 적지 않은 곤란을 겪고 있다는 오기민 마술피리 대표는 이같은 상황에 동의하면서도 남북 영화교류에 절실한 제안을 추가로 내놓았다. 오 대표는 “공동제작 및 로케이션에 대한 남북 합의가 이뤄진다고 해도 정치적 상황에 따라 파기가 될 수 있다면 곤란하다”며 “제작 보증을 정부 혹은 영진위 등이 맡아야만” 남북 교류가 활발해질 수 있다고 조언했고, 이에 김혜준 영진위 사무국장은 “적극적으로 고민하겠다”는 답을 내놓았다.
남북 영화교류의 불씨를 다시 살리자
외금강의 기암절벽을 구경한 마지막 날. 이명세 감독은 절경을 둘러보더니 “이쪽만이라도 촬영이 가능하면 좋겠다”며 아쉬워한다. 씨네2000의 이춘연 대표와 함께 <황진이>를 공동제작하면서 개성 현지 촬영을 추진하기 위해 몇 차례 방북한 적이 있는 조성원 시즈엔터테인먼트 대표지만, “쉽지 않을 거예요”라고밖에 맞장구를 치지 못한다. 2006년 남북영화인대회 개최 등을 통한 인적 교류 증대, 북쪽의 유적지와 자연풍광을 활용한 로케이션 지원, 현대 아산과 함께 남북문화교류센터, 금강산 통일극장 설립 추진 등을 남북 교류사업 과제로 제시한 영진위의 구상과 영화인들의 바람은 과연 실현이 가능할까.
일찍 타올라서 쉬이 꺼진 것일지도 모른다. 1990년, 남북 영화인들이 뉴욕에서 만난 이후 다른 분야보다 남북 교류가 먼저 시작됐지만 이후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그러나 첫 구슬부터 새로 꿰어야 하는 지금, 남과 북이 서로를 필요로 한다면 지금이야말로 교류의 진척을 위해서 더없는 호기일 것이다. 브로커에게 돈을 뜯기거나 무모한 프로젝트가 계획되거나 정치적인 상황에 이끌리는 위험은 점점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2006년, 남북 영화교류의 새로운 장이 열리길 바라면서 다시 먼저 남쪽 영화인들이 손을 내밀었다. 15년 전, 함께 손을 맞잡고 내지른 함성에 비하면 미약하지만, 체계적인 준비가 동반된다면 과거보다 분명 더 큰 메아리를 불러올 것이 분명하다. 2박3일 동안의 짧은 여정, 대검을 꽂은 북쪽 초병을 뒤로하고 남으로 향하면서 영화인들은 그런 확신을 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