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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로 미리 보는 <음란서생> [2] - 궁중
김현정 2006-01-04

조근현 미술감독은 <장화, 홍련>을 하며 집에도 이야기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집엔 누가 처음 살았고 이 방은 언제 어떤 이유로 새로 지었는지 사연을 만들었다. <음란서생>에선 왕이 비와 더불어 노니는 ① 숲속의 정자가 그랬다.” 정자는 여가를 위한 공간이어서 지은 이의 취향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왕의 정자는 불에 타다 남은 처량한 자태다. 지고의 권력을 지닌 그가 어찌하여 번듯한 정자를 올리지 않았을까. “왕은 불쌍한 남자다. 나는 그가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었고 그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정자를 내버려두었다고 가정했다.” 정을 모르는 채 내시와 어울려 혼자 자란 아이. 왕은 그저 비어 있으나 상처보다 아린 정자의 폐허로 윤서를 불러들이고 그 순간 사랑하는 여인을 잃게 된다.

그 여인 또한 정자에 머문다. 거처하는 방과 놀이터 비슷한 공간으로 이루어진 ② 정빈(김민정)의 처소는 팔각정 안에 사각정이 들어앉은 독특한 구조다. 어머니가 쓰던 정자를 정빈에게 내준 왕의 마음이 보이고, 굳이 그 터를 차지하려한 정빈의 성정이 내비치는 것이다. 스케치 단계에서 이 정자는 붉은 기 도는 갈색으로 벽을 두르고 푸른 옷을 입은 정빈을 주인삼으려 했다. 그러나 김민정에겐 진한 보라색이 어울렸고, 정자 또한 중간톤의 보라색으로 바뀌었다. 체구가 작은 정빈이 카리스마를 가진 존재로 두드러지기 위해선 보색보다는 비슷한 색조를 배치하여 색을 강조하는 편이 나았기 때문이다. 대담한 사용이라 하여 눈을 끌었던 ③ 정빈의 검은색 당의와 치마는 눈여겨보면 속이 비치도록 엷은 검정천 아래에 진한 보라색 옷이 숨어 있다.

①③

<음란서생>의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몇겹의 옷을 겹쳐 입는다. 정경희 의상팀장은 패턴을 모아놓은 봉투에 원단을 붙여놓았는데, 많게는 열 조각 가까운 원단이 쓰였다는 사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옷도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지만 단순하게 한벌만 입어서는 이야기를 만들 수 없다.” 모든 천을 염색해서 쓰는 정경희 의상팀장은 옷감의 결을 이루는 텍스처에서도 사연을 찾아내고 치마 아래 숨어 보이지 않는 속옷에도 감정을 불어넣는다. 때로는 글자 그대로 뒤집기도 한다. ④ 왕의 곤룡포가 그렇다. “용무늬를 수놓았는데 그걸 뒤집어봤더니 용이 진흙탕에서 꿈틀대는 듯하여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검정에 가까운 곤룡포에 뒤집은 천을 붙였다.” 왕의 색은 본디 붉은색이라 하지만 문헌엔 새파란 쪽빛 곤룡포도 기록되어 있으며 금박은 진짜 금을 사용해 호화로웠다 한다. 그러나 한벌을 짓자면 수백만원이 들어야 하는 금박을 쓸 수는 없기에 가장 비싼 천을 쓰되 그 위에 천을 한겹 덮는 대안을 만들었다. 왕과 정빈이 입은 옷은 사치의 극단에 있을 테지만 은은하게 숨을 죽여 경박하지 않다.

정빈이 은밀한 자리에서 입는 옷은 검은 당의와 붉은 원삼보다 훨씬 자유롭다. 그녀의 평상복인 ⑤ 엷은 분홍빛 의상은 가슴 밑부분에서 편안하게 퍼지는데, 드라마 <해신>을 보았다면 그 선이 눈에 익을 것이다. 조근현 미술감독은 “그 옷은 통일신라시대 복식이다. 요즘 1970년대풍의 옷을 입는 것처럼, 당시에도 비슷하지 않았을까”라고 시대를 거스른 의상의 형태를 설명했다. 정빈이 음란서적 제조소인 유기전 밀실에서 윤서를 만나는 순간은 선홍색으로 타오른다. 정경희 의상팀장은 음란한 색이 무엇인지 찾다가 불타는 듯 새빨간 색을 떠올렸고 그 위에 기계수를 놓은 ⑥ 노방 베일을 덧붙였다. 여염집 여인들이 흔히 입는 단순한 치마저고리지만 색이 과감하여, 정인을 찾은 한 여인으로서 정빈의 마음이 배어 있는 셈이다.

가장 마지막에 짓고 있는 ⑦ 내시관은 공이 많이 들어간 세트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내시들의 공간이란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아 온전히 상상해내는 수밖에 없었다. 이 공간의 중심은 커다란 나무욕조. 나무가 습기를 먹으면 세월이 묻어난다는 점에 착안하여 공간 전체를 나무로 마감하고 무채색을 사용해 어두운 기운을 불어넣었다. 지금까지 사극에 등장한 내시들은 녹색이나 청색을 주로 입었다. 그러나 <음란서생>은 대나무통에 죽은 성기를 담아 진열하는 내시들의 불행을 검은색으로 애도하였으며, 그 아래 붉은색을 넣어, 이제 사내가 아니지만 여인도 되지 못하는 정욕을 암시했다. 기생을 끼고 앉은 ⑧ 조 내시(김뢰하)의 붉은 옷이 검은 정복을 한겹 벗은 실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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