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출장의 가장 큰 부산물은 디지털 리마스터를 한 데다 DTS까지 입힌 <아비정전> DVD를 비교적 싼값에 산 일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꼽으라면 단연코 장국영이 장만옥을 꼬시는 대목이라고 말하겠다. “내 시계를 봐”라고 장국영은 말한다. 장만옥이 “내가 왜 그래야 되죠?”라고 물으면 장국영은 “딱 1분만 봐주지 않겠어?”라고 답한다. 째깍대는 시계 소리와 함께 1분이 지나면 장국영이 말한다. “1960년 4월16일 오후 3시1분 전, 당신은 나와 함께했어. 당신 덕분에 난 그 1분을 기억할 거야. 지금부터 우리는 1분의 친구야. 이건 네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왜냐하면 그건 과거니까.” 그리고 결국 장만옥은 그 1분에 붙들려 살게 되니, 이 얼마나 로맨틱한 수작이요, 수준 높은 ‘작업’인가. 그들이 나눈 시간은 고작 60초밖에 안되지만, 그것을 돌이킬 방도가 없으니 기억이 작동하는 한 그 1분은 영원히 존재한다. <아비정전>은 지나갔기에 영원히 존재하는 시간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영화 중 하나이며, 그 때문에 또 우리 기억 속에서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미래를 향해서만 흐르는 시간을 멈추거나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아인슈타인 선생님께서 상대성 이론을 통해 시간이 역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지만, 스티븐 호킹 선생님은 그게 안된다고 얘기했던 것 같고, 설사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해도 아직 용산전자상가에 타임머신이 출시되지 않은 걸로 보면 당분간 시간을 거스를 방법은 없어 보인다. 그래도 혹시나, 만약에, 시간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면 난 타임머신은 절대 타지 않을 생각이다. 딱 일주일 전으로 돌아가 로또 복권에 당첨된다면야 인생대박을 맞겠지만(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는 게 <브루스 올마이티>가 입증한 바다), 기계가 이상해져 고등학교 3학년 시절로 떨어지거나 한다면 이건 최악이다. 정말 꿈꾸는 건 <사랑의 블랙홀>에서와 같은 시간의 함정이다. 매일같이 오늘이 되풀이되는 세계, 이곳이야말로 유토피아다. 영화에서 빌 머레이가 그랬듯, 벼랑을 향해 돌진할 수도 있고, 피아노도 선수급으로 익힐 수 있으며, 위급한 상황도 막을 수 있을 거다. 하루만 되풀이되니 먼 외국으로 나간다거나 자식을 갖는다든가 재산을 모은다거나(어차피 그 다음날이면 빈털터리가 될 터이니) 하는 일은 불가능하겠지만, 그동안 사 모은 DVD를 모두 독파한다거나 국립도서관의 책을 몽땅 훑어볼 수도 있을 듯하고, 매일매일 고치고 고쳐 완벽한 기사도 쓸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연유에는 연말이라는 점이 영향을 미쳤을 게다. 가는 2005년을, 도망치는 머리카락을, 살을 파고드는 주름을 굳이 떠올리게 하는 시기니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5년 동안 함께 일하던 동료와의 이별을 막아보고 싶은 마음도 그런 공상을 부추기고 있을 게다. 나이가 더 먹었다는 이유로 선배 노릇을 하곤 있지만, 그는 나보다 일도 능숙하게 하고 더 어른스럽기까지 하다. 매일 같은 날이 반복된다면 그의 일을 도와줄 수도 있고, 좀더 성숙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 아닌가. 하나, 시간의 화살이 활로 되돌아올 수는 없는 법. 그의 마음 또한 이미 우리 곁을 지나친지도 모른다. 이젠, 지나갔기에 영원할 추억을 간직하면서 그를 보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그가 떠나는 날 말하리라. 너 덕분에 난 그 5년을 오래오래 기억하게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