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러진 적수 위에 앉아서 똥을 싸고, 적수는 죽어가면서 그 똥을 먹고 기뻐 소리치는 경우가 어디 있겠는가? 누가 아무 저항도 못하는 연약한 사람을 매달고 사악한 개처럼 그의 정액을 입으로 받아먹는가? 점잖은 독자들이여, 나는 기꺼이 당신이 이 끔찍한 것들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려 했으나, 내 펜이 마치 노수부(老水夫)처럼 자기의 뜻을 세우는구려.” 윌리엄 S. 버로스의 <네이키드 런치>는, 초자아의 장벽이 무너진 인간의 의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독자들의 의식을 발기된 성기처럼 유린한다. 노수부의 최면에 걸려 꼼짝없이 이야기를 듣고 마는 코울리지 시의 청자처럼, 우리, 위선적인 독자들은 버로스의 화려한 언어 향연에 홀려 죽음과 성과 환각을 한데 뒤섞어 시작도 끝도 없이 자아내는 이드(id)의 천일야화를 정신없이 읽어 내려간다. “반문화”의 대표주자이자, 전설적 반항아들의 문파인 “비트 제너레이션”의 일원인 버로스의 매혹은, 언어와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회와 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초자아의 선연한 부재에 있다. 무절제한 성과 마약은 동일시된다. “흥분과 수축의 빈번한 반복.” <네이키드 런치>에서 글쓰기는 배설 행위이고 발화(發話)는 무차별한 사정이다. 육체는 무참하게 훼손되고 쾌락은 죽음과 백지장 한장 차이다.
그러나 타나토스를 향한 이 극단적이고 무모한 방종의 어지러운 기록에도 역사는 어김없이 관통하고 있어서, 전편에 걸쳐 20세기 중반의 세계사를 유린한 파시즘과 관료주의에 대한 공포와 혐오가 드러나 있는데, 어쩌면 이것이 이 발칙한 글쓰기의 진정한 속내가 아닐까. “관료주의는 국가의 모든 곳에 뿌리를 내리고 마약 단속청처럼 악성으로 변하기도 하는” 암적인 존재이고, “검열을 통과하고 관료들 사이를 비집고 나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성(性)”이라고 고백하고 있으니. 무차별한 무의식의 난동에도 끝내는 틀을 짓고 의미를 부과하고 마는 게 예술일까. 이런 맥락에서 흥미로운 것은, 책세상의 새로운 번역본에 수록된 <네이키드 런치> 외설사건의 재판 기록문들과 버로스의 마약 복용에 대한 고백 등 부록들이 덧붙이는 의미다. 본문을 둘러싼 충격완충장치와 같이 기능하기 때문이다. 벌거벗은 글쓰기는, 사회적 역사적 전기적 맥락들 속에서 끝내 어느 정도의 질서와 의미를 부여받는다. 버로스의 마약 경험은 서사의 무정형성과 충격적인 묘사들을 ‘논리적으로’ 설명해주고, 노먼 메일러와 앨런 긴즈버그의 재판증언들은 버로스의 배설적 글쓰기에 사회적 예술적 프레임을 제공한다. 특히 “이러한 기록으로 인해 우리는 좀더 윤택해질 수 있다. 출판업자가 이 기록을 출판하고 공개된 서점에서 합법적으로 팔 수 있을 때 우리는 국가로서 좀더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다”라는 메일러의 일갈은, “포크 끝에 찍힌 음식물이 실제로 무엇인가를 깨닫는” 공포를 회피하지 않는 문화의 힘이 바로 버로스의 힘이라고 친절하게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