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원(장진영)의 삶은 여류비행사로 성장하는 과정이 과감히 압축된 뒤에야 구체적으로 만들어진다. “조선인, 일본인, 남자, 여자를 구분하지 않는 하늘이 가장 좋다”는 그가 다 얻었다고 생각한 하늘을 잃을 처지에 놓인 것이 곧 <청연>의 시작이다. <청연>은 가상의 인물이자 연인인 한지혁(김주혁)과의 관계를 통해 시대를 앞서갈 만했던 여자의 독립심을 보여주기도 하고, 정치적 사건의 누명을 통해 민족주의의 함정에 빠지기보다 개인적인 꿈에 솔직한 인물을 그린다. 이것은 <청연>의 성취다. 조선을 점령하러 온 일본 군대를 보며 닌자에 관한 상상을 하는 어린 박경원을 그린 첫 장면부터 영화는 민족주의의 요구에 따르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민족주의의 강박관념을 배제한 자리에 들어서는 것은 낭만적 로맨스다. 박경원과 한지혁의 사랑은 시대의 아픔과 무관하게 전개되다가 일순간 시대의 소용돌이에 휩쓸려버린다. 개인과 시대의 관계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은 <소름>에서 개인과 운명을 바라봤던 그것과 통한다. 다만 <청연>에는 동료 비행사의 죽음이나 삼각관계 등의 설정 등 감상적인 장치가 훨씬 많다. 그것은 때로 효과적이지만 때로 지나치다. 다소 과장된 연기 스타일과 관습적인 음악 등이 아쉽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다만 박경원의 친일 논란 같은 것은 걱정할 것 없다. 영화 안에서 다 설명이 되는 부분이니 미리 반민족적 영화라고 규정하는 어리석은 일은 안 하는 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