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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잭슨의 걸작 <킹콩> [1]
김도훈 2005-12-26

턱이 빠지고, 눈이 튀어나오고, 심장이 멈추는 서사시. 어렵사리 시사회에 초대받은 팬들의 환호가 아니다. 이는 평소 모질게 쓴소리 잘하기로 유명한 <롤링 스톤>의 평론가 피터 트래버스가 보여준 호들갑이다. 과연 피터 잭슨의 <킹콩>은 비평가 양반들의 노쇠하고 차가운 심장에 9살짜리 어린아이의 박동을 되돌려놓는 영화적 경험에 다름 아니다. 피터 잭슨의 아내이자 프로듀서인 프란 월시가 술기운을 빌려 <뉴스위크> 기자에게 털어놓았던 “다른 감독들이 이 영화를 본다면 완전히(Fucking) 자포자기할 것”이라는 호언에서 거만함보다는 충만한 자신감을 읽어낼 수 있는 연유도 그 때문이리라. 순수한 오락으로서 스펙터클의 진경을 보여주는 <킹콩>의 전모를 살펴보고, 각각의 주요 시퀀스가 만들어진 과정을 통해 피터 잭슨의 비전을 살펴본다.

나는 세상의 꼭대기에 앉아 있다네. 영화가 시작되면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에 오를 콩의 운명을 예감하듯 유성영화 <재즈싱어>의 주연인 알 존슨의 목소리를 타고 재즈넘버 <I’m Sitting On Top of the World>가 흘러나온다. 이 의기양양한 오프닝 송은 마치 제임스 카메론의 악명 높은 오스카 소상소감 “I’m the king of the world”(나는 세상의 왕이다)에 보내는 피터 잭슨의 화답처럼 들린다. 위대한 상업영화의 거장들이 평생을 간직해온 꿈의 프로젝트인 <타이타닉>과 <킹콩>은 여러모로 닮아 있다. 심지어 세기초 사우댐프턴항의 전경을 자신있게 내려보던 <타이타닉>의 개막처럼, <킹콩> 역시 CG로 창조된 30년대 뉴욕을 자신만만하게 보여주며 3막으로 구성된 서사시의 제1막을 열어젖힌다.

피터 잭슨이 벌레먹은 대공황의 사과 속으로 내던지는 것은 벌레스크(burlesque:정통적 문학, 연극 작품을 개작해서 희화화한 오락물) 배우로 일하는 앤 대로우(나오미 왓츠)다. 극단이 문을 닫자 직업을 잃고 굶주림에 시달리던 그녀는 신작에 출연할 여배우를 캐스팅 중인 감독 칼 덴햄(잭 블랙)을 만난다. 덴햄은 신작에 투자한 자본을 몰수하려는 제작자들을 피해 대로우과 시나리오 작가 잭 드리스콜(에이드리언 브로디), 조수 프레스톤(콜린 행크스)을 데리고 ‘모험(Venture)’호에 올라 미지의 섬을 향해 항해를 떠난다. 그리고 그들이 인공적인 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기묘한 ‘해골섬’에 도착하는 순간, 초현실적인 모험으로 가득한 2막이 막을 올린다. 모든 것은 원작대로다. 원주민들에 의해 납치된 대로우는 거대한 고릴라 ‘콩’에게 바쳐지고, 남은 일행은 대로우를 구하기 위해 무시무시한 존재들이 사는 정글 속에 발을 딛는다. 67분의 러닝타임을 지닌 2막은 (스필버그가 아니라) 코난 도일의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영화적 재현처럼 보인다. 여러 개의 중첩적인 장으로 구성된 2막은, 하나의 장이 지날 때마다 더 강한 괴물과 더 극단적인 위험 속으로 관객을 데려간다. 경천동지의 2막이 끝나면 비로소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에서의 마지막 비극이 열릴 것이다.

현대 할리우드가 창조한 진경(珍景)으로서의 <킹콩>은 실로 기념비적이다. 2억달러를 넘어서는 제작비가 투여된 시각적 스펙터클이 3시간의 러닝타임 속에서 심호흡할 기회도 없이 펼쳐지는 순간, 로저 에버트의 말처럼 “오로지 불평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재미있는 것들이 지나치게 많다는 사실뿐”이다. 거의 유일하게 호의적이지 않는 반응을 보인 <뉴요커> 역시 “너무 쉴새없이 스펙터클을 밀어붙이는 바람에 3시간의 상영시간 동안 영화가 좀 탄력을 잃는다”라고 못내 아쉬운 투정을 보내고 있을 따름이다.

1933년 킹콩 vs 2005년 킹콩

오타쿠 소년이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성전을 한 글자 한 글자 모사하듯 만든 <킹콩>은, 당연하게도 33년 오리지널에 대한 매우 충실한 리메이크다. 오일쇼크 시대에 발맞춰 주인공들을 석유탐사단으로 설정하고, 콩의 무덤을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에서 세계무역센터빌딩으로 바꾸었던 76년의 리메이크와는 달리, 잭슨은 온갖 괴물들로 가득한 33년작의 세기초적 모험을 거의 빠짐없이 되살려놓았다. 물론 오리지널의 많은 것들을 그대로 살리는 동시에 잭슨과 그의 일당들은 새로운 요소들을 첨가하고, 현대 블록버스터에 알맞도록 원전을 변형시키는 작업을 수행했다. “사실 어떤 단계에서는 그저 본능적으로 작업했다. 모든 영화감독은 각자의 비전이 담긴 <킹콩>을 만들 것이므로 옳냐 아니냐를 따질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그저 오랫동안 이 영화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무엇을 취하고 버릴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2005년 킹콩

1933년 킹콩

33년 원전의 요소들 중에서는 현대적인 변형이 아예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있다. 가장 오래고 자주 묻는 질문은 이것이다. 도대체 선원들은 쓰러진 콩을 어떻게 맨해튼으로 운반한 것일까. 76년 버전은 거대한 유조선의 한칸에 콩을 실어나른다. 그러나 피터 잭슨은 오리지널 <킹콩>의 감독인 메리언 C. 쿠퍼의 결정이 현명했다고 생각한다. 쿠퍼는 해변에 쓰러진 콩으로부터 곧바로 ‘세계의 여덟 번째 불가사의’로 전시되는 브로드웨이의 콩에게로 컷을 옮긴다. “이것은 영화역사상 가장 대담한 편집이다. 쿠퍼의 방식을 그대로 따르지 않을 수가 없다. 콩이 뉴욕으로 어떻게 갔는지를 보여주는게 왜 필요한가.” 처음 70분 동안 콩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젊은 관객에게 조금 지루해 보일 수도 있다(실제로 시사회 이후 관객은 기나긴 1막의 필요성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중이다). 하지만 1막은 앤 대로우와 콩의 유대감을 위한 캐릭터의 초석을 쌓아서 현대적인 블록버스터로 재창조하기 위해서 무척 중요한 부분이다. 잭슨은 수많은 캐릭터들이 난무하는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서도 마분지에서 오려낸 듯 얇은 캐릭터들을 등장시킨 적이 없다. 그의 철학은 “어떤 신화적 인물들이 등장하건 간에 캐릭터를 피와 살과 뼈가 있는 살아 있는 인물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잭슨이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끝내고 나서야 <킹콩>의 리메이크에 착수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에게 행운이다. 그와 (아내이자 제작자, 각본가인) 프란 월시가 1996년에 처음으로 썼던 각본은 “<인디아나 존스> 스타일의 필사적인 할리우드영화”였다. <반지의 제왕>를 거치면서 잭슨 일당이 얻은 가장 큰 소득 중 하나는 “판타지는 현실적인 방식으로 접근할 때 최고”라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25피트짜리 고릴라가 등장하는 영화를 만들지라도 말이다.

디지털 vs 스톱모션

피터 잭슨은 허상의 캐릭터와 이야기에 현실적으로 접근하는 동시에, 특수효과는 환상 그 자체에 머무르는 길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한번은 조지 루카스가 극비리에 뉴질랜드의 <킹콩> 세트를 방문한 적이 있다. 후반작업에 한창이던 특수효과 슈퍼바이저 알렉스 푼케는 미니어처부가 애써 만든 수작업물들을 자랑스레 공개했다. 하나 조지 루카스는 심드렁했다. “물론, 우리는 이걸 모두 디지털로 할 수도 있지요.” 푼케는 <킹콩>의 기술적인 정신을 담아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물론이죠. 당신은 그렇게 할 수도 있었겠죠. 근데 그래서요?” <킹콩>은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를 비롯한 현대 특수효과의 역작들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 지난 10여년간 할리우드를 통치해왔던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의 정신(실재보다 더욱 실재처럼!)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디지털 특수효과의 어떤 정점에 올라 있으면서도 ‘진짜와 똑같은 것’을 욕심내지 않는 <킹콩>은, <쥬라기 공원>과 <타이타닉>이 아니라 오히려 레이 해리하우젠과 오리지널 <킹콩>의 윌리스 H. 오브라이언이 창조한 스톱모션의 세계를 닮아 있다.

극도의 실재를 추구하지 않은 <킹콩>의 몇몇 장면에서 기술적인 흠집을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특히 브론토사우루스와 카르노사우루스가 질주하는 장면에서는 <쥬라기 공원2: 잃어버린 세계>의 극도로 세밀하게 세공된 공룡들의 질주와는 달리 실사 캐릭터와 디지털 캐릭터 사이의 이물감이 상당히 두드러진다. 하지만 잭슨은 그 장면을 특수효과 자체의 경이로움으로 힘있게 밀어붙인다. 그러고보면 <킹콩>의 특수효과는 완벽함보다는 장면 자체의 미적이고 영화적인 완결성을 위해 설계되어 있는 듯하다. 이를테면 잭슨에게 특수효과는 기술을 넘어선 예술의 일부다. 잭슨은 자신이 사용하고자 하는 시각효과가 얼마나 사실적이냐가 아니라, 얼마나 아름답고 효과적으로 환상을 시각화할 수 있냐에 관심이 있다. 그래서 미니어처의 힘을 빌려 탄생한 해골섬과 30년대의 뉴욕, 그곳을 떠도는 야수들의 이미지는 사실주의 회화가 아니라 살바도르 달리와 루소의 회화에 가깝다. 제임스 카메론이 현실을 현실보다 더 현실처럼 재현하기 위해 애쓰고, 조지 루카스가 거의 강박적인 수준으로 실사를 디지털로 대체하려 한다면, 잭슨은 컴퓨터 상자의 마법에 미켈란젤로의 마음을 담는다. 마치 <천상의 피조물>의 폴린과 줄리엣처럼, 피터 잭슨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굳이 무너뜨리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환상과 현실이란 정확하게 구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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