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현대영화 또는 모던 시네마의 시작으로 불리는 몇 편의 유럽 영화가 동시에 쏟아져나왔다. 장 뤽 고다르가 <네 멋대로 해라>를,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가 <정사>를, 브레송이 <소매치기>를 모두 이 해에 만들었다. 그리고 알랭 레네는 첫 장편 <히로시마 내 사랑>을 만들었다. 레네는 출현과 동시에 영화 사유의 뇌관을 뒤흔들었다. 그럼으로써 고전에서 현대로 영화의 축을 전환시킨 영화사의 코페르니쿠스적 위치를 부여받았다. “레네와 함께 영화의 이미지는 공간과 운동의 문제가 아니라 위상학과 시간의 문제가 되었다”는 철학자 들뢰즈의 선언은 그래서 나왔다. 공간상의 운동을 보여주는 장치로서의 영화를, 주름 접힌 시간을 유영하는 타임머신으로서의 영화로 탈바꿈시키는 이론적 혁신에 성공한 것이었다. 영화감독이 무슨 이론적 혁신이냐고 반문하겠지만, 레네는 어디까지나 영화를 만드는 실천적 영화 이론가였다. <히로시마 내 사랑>과 <지난 해 마리앵바드> 등 초기 대표작들에서 ‘기억’을 전면에 내세워 그 연구에 매달렸다면, 1980년 전환기에 접어들어 만든 이 영화 <내 미국 삼촌>에서는 기억에 맞먹는 혹은 기억에 연루된 행동과학 이론을 온전히 영화화한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뇌는 사고가 아닌 행동의 중추다” 또는 “쾌 또는 불쾌에 대한 기억이 없다면 기쁨, 슬픔, 분노는 물론이고, 사랑도 있을 수 없다. 동물은 움직이는 기억의 집합체다”등등. <내 미국 삼촌>에 흐르는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의 내용 일부이자, 동물 행동학을 연구하는 프랑스의 행동 과학자 앙리 라보리의 이론이다. 당시 레네는 행동 과학자 앙리 라보리의 책을 읽고 크게 감명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이론을 영화로 만들어보고자 했다. 급기야 영화와는 생면부지인 앙리 라보리를 각본에 동참시켰고, 실제로 출연까지 시켰다. 그렇게 해서 앙리 라보리가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는 것과, 주인공인 세 인물의 이야기가 교차하면서 영화는 전개된다.
쟝(로제 피에르)은 국립 라디오 방송사 국장이고, 자닌(니콜 가르시아)은 연극배우이고, 르네(제라르 드파르디외)는 의류업체 기술 간부다. 각각 세 사람의 성장과정에 대한 설명이 끝나고, 쟝이 아내와 함께 자닌의 연극을 보러 가면서 사건이 시작된다. 쟝과 자닌은 서로에게 반해 동거에 들어간다. 한편, 르네는 직장에서의 위치를 놓고 새로 들어온 동료와 신경전을 벌인다. 어느 날, 쟝의 아내가 찾아와 죽을병에 걸린 자신을 위해 몇 달만 남편을 돌려 달라고 하자, 자닌은 쟝을 떠나고 2년 동안 떨어져 지낸다. 강등당한 르네 역시 아내와 떨어져 한직으로 밀려난다. 그동안 쟝은 국회의원이 되고, 자닌은 의류업체 디자이너로 변신하고, 르네는 더 구석으로 몰린다. 쟝의 아내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자닌은 뒤늦게 알게 되지만, 이미 국회의원이 된 쟝은 안정된 생활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하며 자닌의 구애를 거절한다. 그렇게 상처 입은 자닌이 곧장 돌아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처리해야 하는 회사일이란 같은 회사 직원 르네를 강등시키는 것이다. 르네는 결국 자살이라는 선택을 감행한다.
<내 미국 삼촌>은 임상실험에 가까운 영화다. 사건과 이야기의 살이 되는 인물들의 행동은 차라리 앙리 라보리의 이론을 스토리로 바꿔치기해 놓은 것이 아닌가 여겨질 지경이다. 한편으론, 의지로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 그게 이 인물들의 난점이다. 이 세 인물의 이야기는 행동의 연쇄로서 구축되는데, 실상 그것들 중에서 그들이 의지로 수정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까 시간이건, 기억이건, 이미지이건, 그 무엇이건 간에 의지로서 조종될 수 없는 거대한 ‘무의지적 양상’, 그것 아래 놓여 있는 인간의 반응을 레네는 흥미로워한다. 고난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이 영화의 세 인물은 그 순간, 영화에 등장하는 다른 동물들, 즉 실험실의 쥐와 사냥터의 멧돼지와 뒤집혀진 자라와 별다를 게 없는 존재들이다.
그 과정에 미국 삼촌이라는 존재의 비밀도 자리잡는다. 르네는 해고 직전에 몰려 근무처를 옮기는 문제를 두고 아내와 다툰다. “당신은 꼭 아버지 같군, 뭔가 변화를 가져보자고 하면 꼭 미국 간 삼촌을 들먹였지.” 쟝은 자신이 유년 시절을 지낸 브르타뉴 섬 어딘가를 가리키며 “난 저기 보물이 묻혀 있다고 믿었어. 미국에서 부자가 된 삼촌이 이 섬 어딘가에 보물을 숨겨놨던 얘기를 들었거든”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닌은 직장 동료에게 “행복은 횡재 같은 거라 생각했죠. 뜻밖에 얻게 되는 미국 삼촌의 유산처럼”이라고 털어놓는다. 도대체 이들이 하나 같이 말하는 미국 삼촌이란 무엇인가? 프랑스인들은 이 표현을 관습적으로 이해한다고 한다. 그건 베케트 식으로 말해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이고(실제로 레네는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염두에 두며 이 미국 삼촌이라는 말을 썼다고 한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언제 꽃신을 사올지 기대하기 힘든 서울 간 오빠나 다름없다. 미국 삼촌은 오지 않을 존재이며, 의지가 닿지 않는 현재에서 인물들이 소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만약,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내가 지금 뭔가 대단한 훈계를 받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건 정확한 인식이다. 실제로 우리들은 실험실의 유리관 어딘가에 이미 갇혀 있고, 실험대 위에 이미 눕혀져 있는 인물들을 쳐다보고 있는 수강생들이다. 레네는 일종의 강의를 하고, 가설을 입증하려고 든다. 그래서 이 영화를 인간 행동학에 대한 일종의 드라마적 교육이라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다만 놀라운 건 실험실의 이 인물들을 보면서 우리가 웃게 된다는 사실이다. 실상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처한 인물의 곤란이 바로 코미디의 핵심이 아니던가. 그래서 일단 영화 자체도 그리 겁먹을 만큼 어렵지가 않다. 훈계를 듣고도 기분이 상하지 않을 비위만 있다면 오히려 유머러스한 장면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앙리 라보리의 강연을 무시하더라도 충분히 인물들의 감정만을 좇아 즐길 만하다. 오히려 아쉬운 건 영화를 이론화하는 과정에서 언제나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는 레네의 도식성이지, 보기에 어렵고 불편한 개념의 난무는 여기에 없다. 레네의 영화 중 가장 흡인력있고 대중적인 영화로 이해해도 손색이 없을 <내 미국 삼촌>, 이 영화에서 시작하여 레네를 알게 되는 것도 아주 나쁜 방법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