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시시를 처음 본 건 8년 전 모로코에서다. <인샬라> 촬영현장 취재로 찾아간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소국이 알코올을 금해서였을까. 담배 한 보루를 들고 길가를 서성이는 청년들은 해시시도 팔았다. 하필 모두들 말보로 담뱃갑을 들고 섰는데 새빨간 브랜드 무늬가 자꾸 호기심을 자극했다. “담배 말고 해시시?”라고 말문을 열긴 했으나 이빨을 드러내며 씩 웃는 상대방 표정에 왠지 겁먹어버렸다. 같은 대마에서 나오기는 했으나 일반 대마초보다 약용효과가 훨씬 강한 해시시(대마수지)의 거무틱틱한 색깔이 이성의 금지명령을 강하게 불러일으켰다고나 할까. 하물며 대마초조차 절대악의 유혹으로 주입받아온 터에 철통 이성의 규율에 익숙해진 몸이 얼마나 일탈할 수 있을까. <해시시 클럽>의 면면은 이런 조건반사를 무안하게 만든다.
한달에 한번, 파리의 피모당 호텔에 모여 정신의학을 공부한 자크 모로가 반죽해 건네는 해시시로 파티를 열었던 이들 중에 천재과에 가까운 예술가들의 이름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샤를 보들레드, 외젠 들라크루아, 빅토르 위고, 알렉상드르 뒤마, 오노레 드 발자크, 귀스타브 플로베르…. 이들이 ‘해시시 클럽’에 드나들던 때는 19세기 중·후반이다. 근대 규율의 기강이 확립되고 있을 때이니 영혼의 왕성한 식욕에 시달리는 그들이 주저없이 미지의 세계에 뛰어드는 건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더구나 ‘떼’를 이뤄 모종의 의식을 나눴으니 잠재된 죄의식도 쪼개지지 않았을까.
행여 이들이 해시시만 나눴을까, 의구심을 품으며 <아이즈 와이드 셧>에서 톰 크루즈가 목격한 음란한 파티를 상상하는 자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해시시가 선사하는 오감의 무한확장에 따라 물 한잔 마시기도 여의치 않다는 진술을 보면, 또 해시시 효과를 증폭할 수 있어 커피조차 사양하는 정황을 보면 부질없는 상상이다.
환락보다 탐구가 목적이었던 태도를 보면 더욱 그러하다. <해시시 클럽>에 실린 8편의 글은 자신 또는 타인을 관찰하고 분석한 일종의 해시시 주석들이다. 정신과 의사 자크 조셉 모로의 ‘해시시 소고’는 자신을 대상으로 해시시 효과의 기승전결을 자동기술법으로 묘사하고,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피츠 휴 러드로우의 ‘해시시 묵시록’은 해시시에 힘입어 피타고라스 학파의 우주원리를 체험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보들레르의 ‘해시시의 시’는 가장 종합적이며 객관적인 보고서라 할 만하다. 빼놓을 수 없는 글은 “내 이야기가 아니”라며 시작하는 발터 벤야민의 ‘해시시 하이 이야기’다. 해시시가 만들어내는 무궁무진한 불가사의의 세계를 직접 맛보고 이를 일상적인 불가해성을 인지하는 변증법적 시각에 비유하기도 했던 발터 벤야민이 해시시 없이도 거대한 이미지를 마구 찍어대는 기술복제 시대의 도래를 근심했던 건 어찌보면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