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대사를 다시 녹음 한다고?
김기탁 ADR 기사가 왈라를 녹음하다 말고 NG를 낸다. 연출을 너무 격렬하게 한 나머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물병의 물 찰랑이는 소리까지 녹음되게 하고 말았다.
문이 빼곰히 열린 양수리 스튜디오 B 믹싱룸 안에서부터 와아∼ 하는 함성이 새나온다. 김기탁 ADR(후시) 레코딩 엔지니어가 왼손에 빨간 물병, 오른손에 파란 물병을 들고 40여명의 사람들에게 함성 연기를 지시한다. “지금 박경원이의 비행기가 하늘로 치솟았습니다. 그러다 보이질 않습니다. 어, 무슨 일이지? 궁금해하셔야 돼요. 이쪽 손을 보시면서 함성을 질러주시고요, 제가 손을 이렇게 하면 웅성웅성 해주세요.” 왈라 ADR 녹음 중이다. 웅성웅성, 왈라왈라 떠드는 군중의 목소리라고 해서 ‘왈라’라는 이름이 붙었다. <청연>에 필요한 군중은 500명. 이날 녹음되는 왈라를 비롯해 저음의 왈라, 일본어 대사가 구체적으로 들리는 왈라까지 세 종류의 왈라가 녹음, 복사되면 500여명은 금세 만들 수 있다.
극에 관여하지 않는 왈라 소리도 디테일하게 연출하자면 끝이 없다. 일본어 대사가 구체적으로 들리는 왈라 부분은 마침 한국을 공연차 찾은 일본 극단원 10명을 데려다 연출했다. 재일동포가 연출을 도왔다. 중심 인물들의 ADR은 몇배의 공을 들여야 할 작업이다. 배우들이고 감독들이고 ADR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각종 특수효과의 개입으로 100% 후시녹음을 사용하는 <태풍>의 곽경택 감독은 “영화를 만드는 전 과정을 통틀어 개인적으로 제일 공포스러운 것”이 ADR이라고 한다. 현장에서의 연기를 녹음실 안으로까지 생생히 끌어들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운드 스탭들이 프로덕션 사운드, 즉 현장녹음 소스가 최대한 보존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가장 큰 이유도 대사 때문이다. 한국영화는 여전히 대사 중심의 영화 비중이 효과 중심의 영화 비중보다 크다. 감독들은 배우의 감정이 온전히 실린 현장 대사를 녹음 상태가 나빠 쓸 수 없음에 안타까워하고, 녹음실에서는 현장 녹음을 많이 배려하지 않는 현장의 풍토가 안타깝다. 김창섭 블루캡 팀장은 이렇게 말한다. “연기의 본질이 빠져나가기 때문에 ADR은 최후에 써야 할 방법이다.”
소리 하나에는 사연이 있다
곽경택 감독은 <친구> 때부터 사운드 작업을 최태영 실장과 해오고 있다. “크리에이티브가 좋고, 이미지적인 사운드를 디자인한다”고 평했다.
폴리나 ADR 작업은 또렷이 볼 수 있어도 앰비언스 디자인이나 사운드 이펙트 디자인 작업은 눈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특히 영화의 공기와도 같은 앰비언스는 막상 영화를 보면서도 귀기울여 듣기 어려운 사운드 요소다. 그만큼 놓치기 쉽지만 알고보면 매력적인 파트이기도 하다. <텔미썸딩>의 앰비언스 사운드를 연출한 김창섭 팀장은 이 영화의 빗소리를 단지 ‘쏴아∼’ 하는 평면적인 사운드가 아니라 원근과 공간에 따라 각각 다른 소리를 내도록 디자인해 넣었다. 조 형사(한석규)가 거리에서 자동차에 압도당하는 장면에서의 비는 철판 위로 떨어지는 소리와 배수구로 흘러들어가는 소리, 골목을 쓸고 내려가는 소리들이 각각 다르게 들린다. 하나의 소리로 공간을 덮는 것이 아니라 디테일하고 가까운 소리들로 하나의 축축한 느낌을 완성하는 것이다. 때론 감독이 앰비언스의 독특한 활용을 요구해오기도 한다. 임권택 감독은 <춘향뎐>에서 자연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들이 음악처럼 들리기를 바랐다. 사운드 디자인을 한 황진수 아톰사운드 실장은 “새소리를 창가의 추임새처럼 넣어달라”는 감독의 주문을 받고 윤무부 교수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지금껏 자기가 써온 새소리들이 얼마나 시절과 공간에 맞지 않는 소리들이었는지를 알았다고 한다. 새마다 울음소리가 다르고, 계절마다 우는 새들이 다르다. 여태껏 참새, 까치, 소쩍새 울음소리밖에 모르고 살았던 그는 결국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감독님, 감독님 영화는 지금 몇월이에요?”
임권택 감독뿐 아니라 많은 감독들의 요구가 엉뚱할 때가 많다. <반칙왕>에서 김지운 감독은 임대호(송강호)가 레슬링 경기 중 목조임을 당하는 소리를 듣고 싶다고 했다. 장준환 감독은 <지구를 지켜라!>에서 경찰(이재용)의 총을 맞아서 벌 한 마리가 아파하는 소리를 만들어달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임권택 감독은 <하류인생>의 마작 소리가 크게 나는 것과 여자의 울음소리가 크게 나는 것을 원치 않으니 볼륨을 줄여달라고 했다. 감독들의 예측불가능한 요구와 사운드 슈퍼바이저들의 영화에 대한 해석이 균형을 맞추기 위해 믹싱 작업은 의사소통과 크리에이티브 교환이 중요하다. 최태영 라이브톤 실장은 “영화는 지극히 주관적인 매체다. 영화가 표현하려는 감정에 최대한 가깝게, 감독의 주관적인 의도를 관객이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조율하는 사람이 사운드 슈퍼바이저”라고 이야기한다.
<청연>의 믹싱 엔지니어 박상균씨는 폭풍우치는 날씨 속에서 위험천만한 비행을 감행하는 박경원의 비장한 심리상태를 세 가지 버전으로 표현해볼 생각이다. 프리 믹싱본을 본 윤 감독이 좀더 섬세한 사운드 연출을 요구해왔기 때문이다. 윤종찬 감독은 비행기가 등장하는 블록버스터 <청연>을 "남들이 짐작한 대로 찍으면 안된다"는 욕심으로 영화를 찍었다고 말한다. 박상균씨는 빗소리를 강조한 버전, 비행기 소리를 의인화한 버전, 무음으로 처리하는 버전을 만들어볼 생각인데 하다보니 벌써 두 번째 버전은 어렵겠다는 감이 온다. “클라이맥스의 비는 결국 성격 비입니다. 실제로는 비행기 안에 있으면 엔진 소리 빼고 아무 소리도 안 들려요. 천둥소리도 안 들립니다. 하지만 이건 영화니까, 영화적인 과장을 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는 사운드 이펙트를 담당하는 홍예영 기사와 함께 빗소리를 조절한다. 센터 채널에서 나오는 빗소리가 지저분하다고 줄여보자고 한다. 실제 빗소리야 가운데 소리가 덜 나고 좌우 소리가 커질 리 없겠지만 박상균과 홍예영씨는 경원의 비행기 안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소리가 모여 공간을 그린다
사운드 소스 작업에서 편집, 믹싱까지 복잡한 과정들을 거치고 나면 영화 사운드는 하나의 그럴듯한 거짓말이 되어 태어난다. 사운드의 디지털화와 녹음 기술의 발전은 사운드 소스를 좀더 실제에 가까운 상태로 채집하게 하면서 실제에서 가장 먼 소리로 변하는 것 또한 가능하게 만들었다. 미국까지 건너가 따온 <청연>의 복엽기 소리를 우리가 극장에서 듣게 된다면 그 소리는 결코 <청연>의 스탭들이 촬영 현장에서 들었던 소리와 같지 않을 것이고, 우리가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기계의 소리를 <태풍>에서 듣는다 해도 그것은 결국 언제 어디선가 들었던 소리가 바탕이 되어 만들어졌을 것이다. 영화의 사운드가 리얼리티를 담고 있건 과장되게 빚어진 것이건, 정말 흥미로운 것은 소리에 대한 생각만 있어도 공간을 그려낼 수 있다는 점이다. 영화 속에서 인물의 대사가 어떻게 울릴 것인지, 발소리는 어떻게 들릴 것인지, 집 바깥의 소음은 어떤 것일지, 신기하게 생긴 미래형 자동차는 어떤 소리를 낼 것인지, 20년 뒤 미래의 쇼핑몰 안에서 듣게 될 소음은 어떤 것일지에 대한 답을 찾다보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은 결국 하나의 공간이다. 소리는 언제나 공간을 환기시킨다. 사운드를 만드는 사람들은 우리가 자세히 둘러본 적 없는 공간을 머릿속에 그려내고, 가까이 들여다보지 않았던 사물의 재질까지 궁금해한다. 영화 사운드는 그렇게 하나의 세계를 완성한다.
사운드 후반작업이 가장 피를 말리는 순간은, 기술시사를 코앞에 두고 전혀 새 그림이 편집돼 왔을 때다. 폴리부터 시작해야 한다. 가끔 있는 일도 아니다.
윤종찬 감독은 30년대 일본이라는 영화의 시공간적 특성을 작은 소리 하나에까지 최대한 현실적으로 반영할 것이라고 설명한다.
프로덕션 사운드 과정
사운드 소스의 기준
영화의 소리는 현장에서부터 시작된다. 후반작업의 기술적 능력이 높아지면서 영화마다 후반작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지만 프로덕션 사운드가 없으면 포스트 프로덕션 사운드도 없다. 사운드 후반작업에서 폴리, 앰비언스, ADR, 이펙트 등 각 파트가 소스 작업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되는 동일한 사운드 소스가 필요하다. 프로덕션 사운드가 바로 그 기준이 된다.
프로덕션 사운드를 가장 처음으로 매만지는 사람은 다이얼로그 에디터다. 베타 테이프로 녹음실에 넘어온 촬영본을 받아 사운드 소스를 디지털로 전환한 다음, 촬영 현장 주변의 각종 소음들을 최대한 지워내고 가능한 한 현장의 많은 소리들을, 특히 대사를 중심으로 살려놓는 것이다. 어떻게 다듬어도 현장녹음 소스를 100% 활용할 수는 없다. 현장에서의 변수, 동시녹음 기사의 의지, 현장녹음에 대한 현장의 배려 등 촬영현장에서는 현장녹음의 여건을 좋게 만들 여지보다 나쁘게 만들 여지가 훨씬 많다.
<집으로…>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등을 작업한 은희수 동시녹음기사(그는 이 일의 정확한 명칭이 ‘현장녹음기사’(production sound mixer)라는 말을 덧붙였다)는 <청연>의 현장녹음 소스를 후반 소스에 많이 붙이도록 작업하자고 처음부터 목표를 세웠다. “공간감이 많은 영화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작심하고 현장 ADR을 한 부분들이 있다. 흡음제를 써서 세트처럼 현장을 통제하고 ADR을 따기도 했고, 중국 촬영 때는 숙소에 ADR 룸을 만들어서 한국에 다시 들어오기 힘든 일본 배우들 대사 소스를 땄다.” 박경원과 한지혁의 대화와 키스신이 담겨 있는 섬세한 감정신도 그가 계획을 세워 녹음을 준비한 대목. “무선 붐마이크랑 트랜스미터를 새로 구입했다. 테스트할 때는 정말 잘됐다. 들으면서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소스가 완벽하게 따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슛 들어가니까 갑자기 잡음이 끼면서 통제가 안 되더라.” 이런 열정으로 <청연>은 ADR과 동시대사 비율이 6:4로 들어가게 됐다. “황금비율로 나온 것 같다”며 만족해하는 그는 현장녹음의 퀄리티가 확률과의 싸움이자 선택/포기의 문제라고 말한다. “녹음이 잘 될 수 있느냐 못 되겠느냐는 슛 직전이 돼봐야 안다. 그때 판단을 해야 한다. 포기하느냐, 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