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신종합 외에는 별다른 정보도 식견도 없지만 프랑스에서 이민자들의 불만이 폭발하는 걸 보니 90년대 초반 잠깐 체류했던 동안의 단편적인 풍경이 스친다. 프랑스 북부 도시 릴은 영화 <제르미날>에서처럼 예부터 석탄·물류 노동자들의 가난한 도시였다. 덕분에 사회보장 시스템이 잘돼 있었다. 학생은 거지와 동격이라 혜택이 많았는데 외국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민자든 외국인이든 프랑스 거주자라면 기초생활보장을 받았다. 시 주변부에는 허름한 고층 아파트가 많았고 거기 산다는 건 북아프리카에서 이민온 아랍계 사람이란 뜻이었다. 동네 승용차들은 툭하면 유리창이 박살났다. 유리창을 깨고 카오디오를 빼가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아랍계 애들 소행이라고 쉽게 믿었다. 아랍계 애들은 애들대로 자기가 당할까봐 주차 뒤 오디오를 떼어 들고 다녔다. 만성화된 사회현상이었다.
이민자 2, 3세대 중에는 교육을 다 받고도 빈둥대는 이들이 많았다. 놀아도 ‘본적지’보다는 프랑스에서 노는 게 나으니까. 경찰만 보면 도망가는 애들도 많았다. 털어 먼지날 일을 자기가 했거나 형이 했거나 친구가 했기 때문이다. 쓸데없이 검문하고 족치고 들볶는 것도 싫었을 테고. “경찰을 죽여”라는 가사를 흥얼대며 종일 춤만 추는 애들도 있었다. 할 일이 없어서다. 이민자의 실업률은 그때도 평균실업률을 훌쩍 웃돌았다. 이들의 주변부 의식, 피해 의식의 근원을 따지는 일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다.
누적된 이민정책 문제나 묻지마 방화 같은 소요 사태는 “뿌리 깊은 차별과 편견”,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 정책의 결과” 같은 일도양단식 언술로 정리되지 않는다. 다 같은 공화국 인민이라며 통합 정책을 폈다 해도 실제로는 대단히 단절된 삶을 살고 있는데, 이를 정면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럴듯하게 포장만 했던 게 문제가 아니었을까. 외신종합 가운데 눈에 띄는 분석은 “최소한 20년 동안 프랑스 정치권이 교육, 이민, 사회보장에 의문조차 가지지 않은 대가를 치르고 있다”였다. 문득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이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