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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안나 발렌티노비치, <잊혀진 영웅> 제작 중단 요구

잊혀진 ‘영웅’의 항의

폴커 슐뢴도르프 감독

폴커 슐뢴도르프 감독의 대표작은 폴란드 항만도시 그단스크를 배경으로 한 1979년작 <양철북>이다. 그런 만큼 이 도시에 대한 감독의 애정도 남다를 터. 그러나 근 30년 만에 그단스크를 다시 찾아 신작 촬영에 들어간 슐뢴도르프 감독은 이 도시의 불청객이 되어 소송에 휘말릴 위기에 처했다.

문제가 되는 작품은 폴란드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1980년 그단스크 레닌조선소 파업의 핵심인물 안나 발렌티노비치의 일생을 극화한 <잊혀진 영웅>이다. 당시 조선소 크레인 운전사였던 그녀는 전기공 레흐 바웬사와 함께 노조를 이끌다가 해고당했고, 1980년 노동자들이 임금인상 및 두 사람의 재고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자 전국 노동자들에게 연대의식을 호소하며 폴란드 총파업을 주도했던 전설적 노동운동가이다. 결국 공산정권은 노동자들의 요구에 굴복했고, 파업의 성공은 1천만 노동자를 회원으로 하는 동구 최대의 연대자유노조(솔리다노쉬) 창설로 이어졌다. 연대자유노조가 1989년 선거에서 승리하고, 노벨평화상 수상자 바웬사는 1990년 폴란드 초대 직선대통령에 취임했지만, 폴란드 민주화의 또 다른 주인공인 발렌티노비치는 망각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이제 슐뢴도르프 감독이 이 잊혀진 영웅 발렌티노비치를, 역시 <양철북>으로 스타가 된 카타리나 탈바흐를 통해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나 올해 76살인 발렌티노비치는 <잊혀진 영웅>의 제작을 중단시키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진실만을 보여주어야 할 영화”가 자신의 인생을 왜곡해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웅이었던 적도, 영웅이고자 한 적도 없다”는 그녀는 이른바 자신의 삶을 그린다는 영화의 감독과 제작자들이 당사자와 단 한마디의 상의도 없었다면서, 자신을 문맹자에 알코올중독자로 표현한 점, 그리고 공산정권에 동조한 적이 없는 아들에게 경찰 유니폼을 입혀놓은 점 등에 특히 분노하고 있다. 당장 제작을 포기하지 않는 경우 법정 공방도 불사하겠다고 으름장.

그러나 슐뢴도르프 감독은 동요없이 촬영을 진행하고 있다. 폴란드 노동운동사나 실존인물 발렌티노비치의 일생의 재현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이 자신의 이념에 충실할 때 역사의 흐름까지 바꾸는 저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자신의 의도라고. 주인공은 발렌티노비치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익명의 여성노동자일 뿐이라지만, 발렌티노비치의 항의는 곱게 끝날 것 같지 않다. 타이틀과 주인공 이름은 바뀌었지만, 누구라도 주인공을 통해 자신을 연상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발렌티노비치는 법정 공방에 대비해 변호사까지 물색해놓았다고 한다.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한 픽션영화 감독의 고달픈 처지는 한국이나 폴란드나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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