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함이라는 상태에 이목구비를 갖추고 몸을 만들어 붙인다면 아마 이날의 문정혁이 아닐까 싶다. 약속시간을 훌쩍 넘겨 나타난 문정혁은 피곤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직 ‘배우’라는 꼬리표보다는 ‘스타’나 ‘아이돌’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그는, 에릭으로서의 일정과 문정혁으로서의 일정을 동시에 소화하느라 무척 지쳐 있었다. 특유의 활짝 피어나는 미소도 없이 나타난 그는, 놀랍게도,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아름다운 피사체가 되어주었다. 노곤한 표정 사이사이 예고도 없이 강렬한 눈빛이 튀어나왔고, 잠시 쉬는 짬이라도 나면 눈을 감고 피로를 다독이다가도 금세 이런저런 포즈를 취해보이곤 했다. 늦은 것 때문에 미안했는지, 문정혁의 매니저는 “새벽 6시까지 일이 있었다”고 둘러댔지만, 인터뷰를 위해 마주앉은 에릭은 “어제 모처럼 신화 멤버들이 다 모여서 새벽 6시까지 술을 마셨다”고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거짓말보다 털털한 솔직함이 어울리는 이 남자를, 늦었다고 미워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신인이라면 피해가기 힘든 것 중 하나는 첫 작품과 비슷한 이미지의 작품을 연달아 하게 되는 데서 얻는 ‘고정된 이미지’이지만, 문정혁에게는 이런 징크스가 통용되지 않는다. <나는 달린다>의 상식은 거칠고 강했지만, <불새>의 정민은 초절정 느끼남이었고, <신입사원>의 강호는 씩씩하고 정의로웠다. TV드라마에서만 그랬던 건 아니다. 영화 데뷔작인 <달콤한 인생>에서는 과묵하지만 주인공을 쏴죽이는 결정적 장면을 선사받은 킬러로 분했지만, 개봉을 앞둔 <6월의 일기>에서는 일보다 사생활을 앞세우면서도 사건 해결에는 똑 부러지는 형사 동욱을 연기했다. 한 작품을 끝낸 뒤 비슷한 이미지의 작품이 쏟아져 들어오는 일을 당연히 문정혁도 겪었다. 특별히 변신을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특별히 조심하는 것은 있었다. “명랑한 역할을 이어 하면, ‘웃기는’ 이미지로 고정될 것 같아 극구 피했다. 진지한 연기를 해도 보는 사람들이 ‘풋’ 웃음을 터뜨리는 게 최악이라고 생각했다.” 영화를 하면서는 서둘러 주인공을 하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6월의 일기>에서도 주인공이 아니라 오히려 좋았다. 선배들과 호흡을 맞춰 함께 만들어가는 게 좋더라.” 과욕을 부리기보다는 반듯한 진정성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떼는 법을, 그는 일찍 익힌 듯했다.
신화로 처음 활동을 시작할 때 문정혁은 이미 혹독한 트레이닝 과정을 겪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기상 보고를 하거나 약수터에 갔다오는 것도 트레이닝의 일부였다. 데뷔 직후, 공연 직전에 멤버들과 크게 투닥거리며 싸워서 상처난 얼굴을 분장으로 가리고 무대에 선 일도 있었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제2의 가족이 된 신화 멤버들은 그에게 가장 무서운 ‘시어머니’다. “<불새> 때, 원래는 모든 대사마다 ‘와우!’, ‘웁스!’ 하는 대사가 있었다. 빼달라고 감독님께 읍소했다. (웃음) 녀석들(신화 멤버들)이 뭐라고 놀려댈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여자 친구가 만천하에 공개되어 시시콜콜한 일까지 기사화되는 것도, 오래 유명세를 치른 그에게 크게 나쁜 일은 아니다. “여자 친구를 공개해서 오히려 좋은 점도 있다. 이제 거짓말할 필요가 없으니까.” 낚시를, 그것도 쉽게 손대기 힘든 대낚시를 좋아해서 찌를 문 물고기의 소리를 듣고 그 종류를 맞히는 그는 엉뚱하게도 바다를 무서워한다. “고래도 죽인다는 대왕오징어 있잖나, 생각만 해도 무섭다. 바다가 정말 무섭다.” <6월의 일기> 촬영 중 힘들거나 무서웠던 일을 묻자 비슷하게 엉뚱한 대답이 돌아온다. “김윤진 선배와 똑같이 만든 더미(인형)이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무서웠다. 사람들이 안 볼 때 막 눈을 뜰 것 같고.” (웃음) 군대문제 때문에 영주권을 포기할 때 갈등이 크지 않았느냐고 묻자 “계속 이곳에서 활동을 할 거니까”라고 담담하게 답한다. 인기의 절정에 있는데, 미래가 두렵지는 않을까. “재밌고 즐겁게 일하려고 한다. 열심히 하다가 즐겁게 할 수 없는 시간이 되면, 뭐, 어쩔 수 없지 않겠나. <6월의 일기>를 보고, 관객이 ‘문정혁은 재미있는 작품을 고르는 배우’라고 생각해주면 좋겠다. 내가 돋보이는 것은 아직 욕심내지 않는다.” 황정민과 정재영을 좋아한다며 그는 씩 웃어보였다. “<너는 내 운명>을 아직 못 봤는데, 여자 친구랑 같이 보러 갈 생각이다.” 스물일곱, 문정혁은 인생을 착실히 ‘즐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