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저녁 밤 10시 TV는 환자들로 넘친다. 그게 진짜 병이건, 돈이면 다 된다는 병이건. 이제 드라마 필수 배역은 재벌 2세 아니면 환자다. 시청률 최악이란 된소나기를 맞은 <가을 소나기>의 식물인간이 벌떡 일어나자, 다른 방송사 인물이 얼른 식물인간으로 드러누웠다. <이 죽일놈의 사랑>. ‘이 죽일놈’이 ‘사랑’인지, 주인공 남자인지 아리까리한 이 드라마에는 두 가지가 다 있다. 환자와 재벌 2세. 다음날인 수·목요일에는 최진실이 얼굴에 시쳇빛 분장을 하고 ‘시쳇빛 인생’을 펼쳐 보인다. 덕분에 다른 채널을 누르려고 해도, 눈물이 앞을 가려 보이질 않는다. 주말에는 아예 재벌 2세가 도로변으로 뛰어들었으나, 명이 질긴 건지 돈이 많으면 죽을 인간도 멀쩡히 살려내는 건지, 교통사고 환자치고 멀쩡한 환자가 된다(원래 식물인간으로 하려다가, <가을 소나기>의 시청률 된서리를 벤치마킹해서 살린 건가?). 그런데 이 화창한 가을날 저녁에 드라마들이 정말 다들 왜 이러시나?
이러니 나 같은 초짜도 척하니 진단, 아니 새 드라마의 줄거리가 나온다. 아예 재벌 2세와 식물인간을 결합시키는 거다. 싸가지 없는 재벌 2세가 음주운전 단속을 피하려고 차에 경찰까지 매달고 달리다 사고를 일으켜 식물인간이 된다. 그를 간호하려고 간병인을 붙였는데, 미모는 뛰어나지만 머리는 뛰어나게 모자란 여자가 간병인으로 온다(아니면 외람되게도 무척 한가한 여자 의사가 나오거나). 이 여자, 실수로 최첨단 기계를 잘못 누르는 바람에, 그 충격으로 의식불명이던 남자가 깨어난다. 놀란 여자는, 너무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어 팔다리 운전이 부실한 남자를 휠체어에 싣고 달아난다. 멋모르고 실려 온 남자에게 여자가 말한다. “당신… 암이래요.”(여자는 꼭 존댓말을 해야 한다) 남자는 “내 된장빛 인생”을 외치며, 절망한다. 방송과 신문을 차단당하던 남자는 우연히 자기 사진이 실린 잡지를 본다. 그리고 자신이 걸린 암이 ‘왕자암’이며, 자신이 재벌 2세임을 안다. 여자가 혼자 뇌까린다. ‘이 죽일놈의 사진.’ 놀라고 화가 나 (실은 기뻐서) 뛰쳐나갔던 남자는, 자신이 그 여자를 사랑했음을 알고 명품 슈트를 쫙 빼입고 비싼 차를 (브랜드 잘 보이게) 타고 여자를 찾아온다.
아, 정말 마이 봤다 아이가! 이러니 그냥 환자들이 줄줄이 나오는 외화 <그레이 아나토미>나 봐야겠다. 물론 여기에도 식물인간은 나온다. 하지만 식물인간의 장기는 얼른 다른 사람에게 기증해서 새로 여러 사람 살리자는 의사들이 나온다. 그리고 그가 죽어 정말 여럿 살린다. 문득 생각한다. 식물인간처럼 만날 그 상태인 드라마들이야말로 장기 기증이 필요한 것 아닐까? 아니면 식물인간이 깨어나길 기다리며, 허구한 날 기도나 해야 하는 건가? 하느님, 참 힘드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