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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멜랑콜리한 로맨스, <이터널 선샤인>

공드리·카우프만 콤비의 기억상실증 로맨틱코미디 <이터널 선샤인>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이란 제목은 머릿속에 각인되기도 전에 잊혀지는 부류의 제목이다. 하지만 이 점은 프랑스의 뮤직비디오 귀재 미셸 공드리 감독이 작가 찰리 카우프만의 시나리오로 만든 이 재치있고 위트있고 대단히 재미있는 영화의 중요한 포인트이기도 하다. <이터널 선샤인>은 머릿속으로 떠나는 여행이다.

머릿속으로 떠나는 시간여행

기억상실증을 트릭으로 구사한 어떤 로맨틱코미디보다도 세련된 영화인 <이터널 선샤인>은 작가 카우프만이 스파이크 존즈 감독과 만든 <존 말코비치 되기>, <어댑테이션>과 지나쳐보기 힘든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또 공드리의 첫 번째 장편 <휴먼 네이쳐>(역시 카우프만이 쓴)와 비교할 때 장족의 발전을 보여준다. 작가의 트레이드마크인 신경과민증의 주인공들, 나른하고 수수한 분위기 그리고 가정 내 불화에 관한 우울한 강조로 가득찬 이 영화는 이상야릇하며 간헐적으로 예지가 번득이는 두뇌게임이며 너무나 뒤엉킨 나머지 불가피하게 관객을 또다른 세계로 데려다놓는 퍼즐이다.

마치 ‘퀵실버 메신저 서비스’의 LP에서 따온 것처럼 들리는 이 영화의 제목은 사실 알렉산더 포프의 서간체 시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에서 빌려온 것이다. 영화는 교외에 사는 싱글 조엘(짐 캐리)이 어느 날 아침, 도시에 있는 자신의 일터로 향하는 대신 충동적으로 몬타우크로 가는 열차를 잡아타고 그곳에서 파란 머리를 한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럿)을 만나는 이상한 도입부로 시작된다. 그녀는 이상하리만큼 적극적인 반면 조엘은 심하게 부끄러움을 타고 어설프게 웃는다. 여차저차해서 클레멘타인은 그를 자신의 아파트로 끌어들이는데 집은 온통 ‘감자 아저씨’ 캐릭터로 가득하다. 그들의 만남은 빠른 스피드로 진척되고 갑자기 안절부절 못하는 조그만 호빗(엘리야 우드)가 조엘의 차창을 두드린다.

아무런 편견없이 <이터널 선샤인>을 마주하고 싶다면 당신은 지금 이 글을 읽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 영화는 플래시백과 멋대로 떠다니는 기억 상실의 구름으로 복잡하게 얽혀있기에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정리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다만 클레멘타인이 조엘에 대한 기억을 지우기 위해, 상냥한 미어즈웩 박사(톰 윌킨슨)가 운영하는 라쿠나 회사가 제공하는 아직 상용화하지 않은 세뇌 서비스를 의뢰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화가 나 똑같이 대응하겠다고 마음먹은 조엘은 클레멘타인을 떠올리게 하는 모든 물건을 두 개의 커다란 쓰레기 봉투에 가득 담아 들고 미에즈윅 박사의 2층 사무실로 흥분하여 달려간다. 그가 박사에게 수술이 뇌를 손상시키느냐고 묻자, 박사는 “기술적으로 말해 이 과정 자체가 뇌 손상"이라고 말한다.

우유부단한 성격의 조엘은 잠든 상태로, 겁나게 비전문적인 두 기술자들(우드와 마크 러팔로)과 요염한 여조수(커스틴 던스트)의 훈수를 두며 집행하는 수술 도중에 갑자기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영화는 이 대목에서 조엘의 내면과 외부를 정신없이 왔다갔다하고, 조엘은 의도했던 것과는 반대로 최근의 기억을 잊고 클레멘타인과의 관계를 되살리고 구해내게 된다. <이터널 선샤인>은 자신의 비논리에 있어서 일관성이 없다. 그러나 과거 속 사람들과 장소들이 튀어나오는 동안 클레멘타인을 자신의 거짓된 유년 시절의 추억이나 창피한 자위행위 판타지 속으로 데려가 숨기려고 분투하면서까지 행복한 기억을 지켜려고 처절하게 싸우는 모습은 부인할 수 없는 페이소스를 발한다.

<뉴욕 타임즈> 기사로 판단하건대 카우프만은 존즈의 평판에 기여한 만큼 공드리의 경력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공드리 감독은 카우프만의 시나리오 외에도 촬영감독 엘렌 쿠라스의 들쭉날쭉한 구도와 우울하고 흠뻑 스며드는 색채, 이미 언급된 배우들과 함께 환상적으로 무심한 코미디 앙상블을 이룬 존경할 만한 제인 아담스에게서도 큰 도움을 얻었다. <휴먼 네이쳐>가 구성에서 시트콤 <치어스>(Cheers)의 옛 에피소드 수준의 신선함을 보여줬다면 <이터널 선샤인>은 어울리지 않는 짝들이 이루는 불가사의하고 미묘한 격동을 보여준다. 많은 주요인물들이 전형을 벗어나 캐스팅되었을 뿐 아니라 특수효과도 하이테크에 반한다.

혼돈에 찬 서글픈 러브스토리

아마도 공드리의 유럽적인 멜랑콜리함이 카우프만의 극히 섬세한 대본에 잘 맞아떨어진 것이 아닐까. <이터널 선샤인>은 센세이셔널할 만큼 어울리지 않는 커플이 등장하는 개념적인 러브스토리이다. 영혼이 길잃은 두 남녀의 고통은 알렉산더 포프가 쓴 시 속의 엘로이즈처럼 감동적이지만 우울증인 조엘도 조증인 클레멘타인도 특별히 매력적인 인물은 아니며 둘의 감정은 격한 변덕에 휘둘린다. <이터널 선샤인>은 거의 잊혀진 알렝 레네의 시간여행 로맨스 <사랑해, 사랑해>(Je T’Aime, Je T’Aime)을 다시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공드리는 한 발 더 나아가 기억을 지우는 과정의 혼돈스런 구조를 사용함으로써 인간 지각의 연약함을 보여준다. 정신적 병증과 유사한 무엇을 빌어 찍은 영화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영원한 빛)이라는 제목이 주는 발랄한 느낌과는 멀찌감치 떨어져있다.(만약 잉마르 베리만이 리메이크한다면 정말 폭소를 터뜨리게 할 것 같긴 하다). 마치 사랑이 그러한 것처럼, 유희적이면서도 힘겨운 이 영화는 요즘 미국영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서글픈 허름함을 지니고 있다. “훌륭하게 노래한 괴로움은 내 시름에 찬 영혼을 달래주리니,” 알렉산더 포프의 시에서 그리움으로 수척해진 엘로이즈는 이렇게 편지를 맺는다. “괴로움을 가장 크게 느끼는 자, 괴로움을 가장 잘 그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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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백진희(2004. 3. 17 짐 호버먼은 미국 영화평단에서 대안영화의 옹호자로 가장 명망이 높은 평론가로 <빌리지 보이스>에 기고하고 있습니다. <씨네21>과 <빌리지 보이스>는 기사교류 관계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