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솔리니 시대의 이탈리아엔 백색전화 영화란 게 있었다. 부르주아 저택에서 벌어지는 연애담이 주를 이루는 영화로 안락한 거실의 백색전화가 눈에 두드러져 붙여진 이름이란다. 백색전화는 궁핍한 대중에게 현실도피의 환상을 채워주는 당시 영화의 상징물이었다. 그러나 2차대전이 끝나자 이런 주류영화에 반기를 든 일군의 감독이 나타났다. 로베르토 로셀리니, 비토리오 데 시카, 루치노 비스콘티. 그들은 부자의 집에서 벗어나 거리로 뛰쳐나갔고 스타 배우들 대신 비전문 배우에게 연기를 시켰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시작이다.
1950년대 프랑스에선 <카이에 뒤 시네마>의 젊은 평론가들이 소란을 일으켰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글 ‘프랑스영화의 어떤 경향’은 영화계를 뒤흔들었다. 프랑스영화의 주류를 형성하던 감독들을 맹렬히 씹었던 그는 이후 누벨바그의 주역 가운데 하나가 됐다. 독일도 비슷했다. 1962년 오버하우젠 선언은 아버지의 영화는 죽었다고 선포했고 그뒤 전 세대와 전혀 다른 영화들이 쏟아져나왔다. 1960년대 일본 영화계는 또 어떤가. 오즈 야스지로의 조감독 출신 이마무라 쇼헤이는 “일본에 더이상 오즈 영화의 여인은 없다”며 욕망에 몸부림치는 여자를 그렸고 오시마 나기사는 정치적, 미학적 과격함으로 메이저 스튜디오를 겁에 질리게 만들었다. 새로운 영화는 그렇게 기성 영화계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했다.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70년대 하길종과 이장호는 낡은 영화계를 뒤엎고자 했고 80년대 장선우는 “지금 한국 영화계는 매춘의 겨울”이라고 일갈했다. 흔히 충무로라 부르는 주류 영화계는 90년대까지 늘 증오와 개혁의 대상이었다. 다 흘러간 얘기지만 이번호 특집기사를 준비하며 그런 일들을 떠올렸다. 왜일까? 영화과, 영화동아리, 영화아카데미 등 젊은 영화광 혹은 예비 영화인 211명에게 돌린 설문의 핵심은 그들이 지금 최고라고 생각하는 영화, 감독, 배우 그리고 과대평가 또는 과소평가된 영화와 배우를 묻는 것이었다. 그 결과는 한편으론 다행스럽고 다른 한편으론 우려스럽다. 그들은 주류 영화계의 스타 감독을 숭배했고 이른바 흥행과 비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싶어했다. 그만큼 지금 영화계가 건강한 곳이라는 뜻이겠지만 다음 세대가 새로운 영화를 만들기를 기대하는 이들에겐 어딘가 잘못됐다는 느낌도 갖게 한다.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영화 붐이 기존 영화계에 대한 반발을 기초로 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더욱더.
이제 부정의 정신은 없어졌는가? 이번 설문결과를 보면서 자연스레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번 조사가 젊은 세대의 의식을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짚고 있다고 자신하긴 힘들지만 대체적인 경향만 본다면 아주 말랑말랑하다는 인상을 받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요즘 젊은이들은 패기가 없어, 라고 탓할 일은 아니다. 박찬욱 감독을 최고의 감독으로 꼽으면서도 <친절한 금자씨>를 가장 과대평가된 영화라고 말하는 걸 보면 영화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무조건적인 선망은 아닌 듯하고, 황정민이 최고의 남자배우로 꼽힌 걸 보면 변화에 대한 갈망도 엿보인다. 또한 대학 졸업작품으로 <용서받지 못한 자> 같은 수작이 나오는 마당이니 설문결과를 일방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나의 바람은 이번 특집이 부정의 정신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였으면 싶다. 눈여겨본다면 한국영화에 지금 부족한 부분,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길, 실종된 미학적 전통이 무엇인지 이번 설문결과를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옛것의 부정과 새것의 창조는 결국 우리 자신의 결핍을 깨닫는 데서 출발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