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치쿠 누벨바그와 <남자는 괴로워>
<남자는 괴로워>의 배경이 된 시바마타에는 주인공 ‘도라’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1953년 텔레비전이 첫 등장할 때만 해도 영화계의 우려는 크지 않았다. 1958년 당시 관객은 현재의 10배인 연간 11억2745만명에 달했다. 민간방송 출범 당시 영화계도 미국에 시찰단까지 보냈지만 흐지부지되었고 방송국은 신문사들이 맡게 된다. “여기에서 영화계의 운명은 갈렸다”고 하마노 교수는 말한다. 1965년 관객이 3억6천만명으로 격감했고, 1975년엔 처음으로 일본영화 관객이 외국영화 아래로 떨어졌다. 장기가 TV의 홈드라마, 가정극과 가장 비슷했던 쇼치쿠가 가장 타격이 컸다. 이전까지 확고한 업계 1위였던 쇼치쿠는 1958년 이미 3위로 떨어졌다.
하마노 교수는 역설적이지만 “일본에 홈드라마라는 장르를 확립한 것”이 쇼치쿠의 기여라고 했다. 기노시타 감독은 1970년대 실제 <TBS>가 지원해준 기노시타 프로덕션을 통해 수많은 홈드라마들을 만들어냈다. 일본의 2대 드라마 작가 중 한명인 야마다 다이치는 기노시타의 조감독 출신이며, 또 한명 구라모토 소오는 오즈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쇼치쿠에게도 변화의 기회가 있었다. 1950년대 말 젊은 감독들을 데뷔시키면서 선전부는 ‘쇼치쿠 누벨바그’라며 이들을 내세웠다. 오시마 나기사, 시노다 마사히로, 요시다 기주(한국에선 요시다 요시시게로 잘못 이름이 알려져 있는) 등이 내건 강렬한 청춘·애정영화는 당시 절정에 달했던 안보투쟁을 배경으로 거친 에너지와 비판의식을 고스란히 담았고 흥행도 크게 성공했다. 하지만 너무나도 정치적이고 파격적이었던 오시마의 <일본의 밤과 안개>를 회사쪽이 개봉 4일 만에 극장에서 떼어내고 이에 오시마 등이 쇼치쿠를 나가면서 반짝했던 변화의 시도는 끝나고 말았다. 닛카쓰가 이시하라 유지로를 앞세운 새로운 청춘영화나 무국적풍 액션, 도에이가 야쿠자영화 등 그나마 방송에 없던 새로운 시도를 할 때 쇼치쿠는 과거에 안주한 셈이다. 도호나 도에이가 부동산 회사들을 각각 모태로 해 개발 거점에 극장을 세우며 출발한 영화사인 데 비해, 처음부터 ‘순수 연극, 영화사’라는 쇼치쿠의 높은 자존심도 작용했다.
오시마와 함께 1954년 입사했던 야마다 요지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입사 당시엔 전형적인 오후나 멜로드라마에 질려 있었다. 조명을 해도 오로지 밝게. 구로사와처럼 강렬한 콘트라스트를 쇼치쿠는 싫어했다. 소프트하고 부드럽고 구석구석 밝은 화면. 그런 것의 가치를 젊은 때는 알 수 없었다. 금방 망원렌즈를 사용해버리고 싶고. 하지만 쇼치쿠의 촬영감독들은 망원을 바보처럼 여겼다. 첫 촬영날 망원을 쓰겠다고 하다가 혼나기도 했다”고 말한 적 있다. 그런 야마다 감독이 ‘가장 쇼치쿠적’이라는 <남자는 괴로워>를 48편 만들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1969년 시작된 이 시리즈는 27년간 8천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총매출 480억엔을 기록했고 일본인들의 영원한 친구 ‘도라상’(아쓰미 기요시)를 낳았다. 다나카 고기는 “이 시리즈의 성공에 안주했던 게 쇼치쿠의 변화를 더디게 한 원인이기도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쇼치쿠풍 드라마는 지금도 무시할 수 없다. 88년 시작된 <낚시바보일지> 시리즈는 올해 16번째 작품을 내놓았다. 낚시광인 만년 평사원 ‘하마짱’은 오늘날 샐러리맨들의 스트레스를 웃음으로 날려주는 존재다. 하마짱의 배짱 앞에서 꼼짝 못하는 사장 ‘스상’은 이상적인 기업주라 할 정도로 속이 깊다. 시리즈의 최근작 3편을 내리 감독한 아사하라 유조는 쇼치쿠풍의 영화를 시대에 맞게 새롭게 일궈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통이 무조건 부정되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
110년을 갈무리하고 내일을 준비한다
쇼치쿠의 변화의 시작은 더뎠지만, 착실히 진행되고 있다. 쇼치쿠는 촬영소를 매각하던 99년 블록부킹 시스템(일정기간의 상영을 보장하고 자사영화를 자기 극장에 걸던 방식)을 프리부킹 시스템으로 바꿨다. 갑작스레 영화수급이 끊기며 그해 경영은 마이너스로 곤두박질쳤지만 오히려 이것이 경영에 숨통을 틔워주었다. <반지의 제왕>의 대히트 같은 운도 따라줬다. 최근 1∼2년 사이엔 애니메이션 본부 신설, 개인투자펀드(<시노비>), 지적재산권신탁을 이용한 펀드(<아수라성의 눈동자>) 등 새로운 시도를 공격적으로 펴나가고 있다.
물론 일본 영화계가 메이저 스튜디오 중심으로 다시 돌아갈 가능성은 없다. 이미 80년대부터 메이저의 지배는 깨져나갔다. 도호가 막강 1인자라지만, 배급의 얘기일 뿐 더이상 제작사로 보기 어렵다. 1970년대 중반 일찌감치 방계 회사들에 제작을 넘기기 시작했고 지난해 <고질라>를 끝으로 아예 자체제작은 중단한 상태다. 멀티플렉스의 증대, TV 방송국의 영화계 장악, 단관계 개봉의 유행 등으로 영화계의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이치야마 프로그래머는 “단적으로 메이저 스튜디오가 쇠퇴했지만 일본영화의 전체 제작편수는 다시 늘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올해는 300편이 넘을 거라 추산된다. 경로가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1997년 <하나비>가 2개관에서 개봉해 장기상영하는 단관계 개봉 방식을 선택해 대성공을 거둔 이래, 일본에선 이제 영화계의 상식이 되어버렸다. 아예 비디오로 촬영해 단관의 레이트 쇼으로 개봉하는 사례도 크게 늘었다. 이전의 V시네마가 액션야쿠자영화 중심이었다면 요즘은 장르도 다양하다. 방송국의 영화제작은 바꾸기 힘든 흐름이다. 마케팅비가 총제작비의 절반을 훨씬 넘기 일쑤인 일본에서 채널에서 광고를 쏘아대는 TV의 힘은 막강할 수밖에 없다. 110살의 쇼치쿠는 이런 변화 속에서 새 출발점에 서 있다.
“전통 속의 혁신이 우리의 힘이다”
쇼치쿠 영화부문의 실책임자 히사마쓰 다케오 상무 인터뷰
히사마쓰 다케오 상무는 영상본부 부본부장과 영상기획부를 맡아 쇼치쿠의 영화 관련 부문을 사실상 이끌고 있는 인물이다.
-쇼치쿠 110년의 원동력은.
=가부키가 400년 된 전통문화지만 혁신적인 면이 있다. 건담의 모빌슈트도 가부키의 연기에서 얻어온 것 아닌가. 토키영화와 컬러영화를 처음 만든 것도 우리다. 아마 쇼치쿠가 전통만을 고집해왔다면 이미 망했을 거다. 전통 속에서도 혁신을 이뤄왔던 게 힘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0년대부터 서서히, 그리고 90년대에는 심각한 위기가 왔다. 침체의 원인은 뭔가.
=쇼치쿠를 빛낸 게 강력한 디렉터 시스템이었지만 거꾸로 말하자면 ‘시장’에 대한 생각을 덜 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밖에선 텔레비전이다, 외화 수입이다, 애니메이션이다 하는데 쇼치쿠는 자존심만 세우고 시장을 보지 않았다. 대중의 취향이 바뀐 데 대한 인식과 대응 프로세스가 없었다.
-오후나 촬영소 매각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있었다. 당시 신키바 촬영소 건설을 노조에 약속했는데.
=90년대 말 수십억엔 적자에서 지난해에는 43억엔 흑자로 돌아서고, 부채도 절반으로 줄었다. 그 계기가 촬영소 매각이었다. 쇼치쿠가 살기 위해선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신키바는 계속 검토 중이다. 하지만 무조건 촬영소를 만드는 게 아니라 만들 만한 기획과 인력의 정비가 먼저다.
-제작, 배급, 흥행의 이후 계획은.
=시네콘을 착실히 늘려 현재 목표로는 2007년 쇼치쿠의 전국 300여개 스크린 중 90% 가까이가 시네콘이 될 예정이다. 하지만 극장은 안정적인 대신 큰 비약도 없는 부문이다. 배급은 5∼6년 전엔 고생하다가 이제 겨우 외화, 애니메이션까지 포함한 라인업을 갖추게 됐다. 제작은 돈버는 건 아니지만, 어떤 의미에서 영상부문의 원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걸로만은 안 되기 때문에 지금은 1년에 5∼6편 정도만 생각하고 있다. 대신 비디오는 좀더 늘릴 예정이다. 비디오 시장을 2배까지 늘릴 생각이다.
-어쨌든 지난해부터 다시 자체제작이 늘어났다. 대중의 취향에 대한 분석을 어느 정도 했다는 얘기인데.
=멀티플렉스가 지역에 확실히 자리잡고 도심까지 진출하면서, 쇼핑센터에 구경나온 가족 단위 관람객이 요구하는 가족 취향, 젊은이 취향의 영화 수요가 크게 늘었다. 예전엔 도시 대 지역의 흥행비율이 7:3이었으면 요즘은 그 반대다. 쇼치쿠가 지난해부터 내놓은 <퀼> <캐산> <시노비> 같은 게 그런 분석을 반영한 결과다. 아마 이전이라면 절대 쇼치쿠 영화라 믿지 않을 거다. 물론 야마다 요지 감독의 영화도 있고 <낚시바보일지> 시리즈도 만들지만, 액션영화나 젊은 감각의 영화들을 추가해 좀더 다양한 균형감을 갖추고 싶다. <세카추> 같은 순애영화도 만들고 싶다.
오즈 야스지로부터 야마다 요지까지
쇼치쿠의 산증인 다나카 고기가 말하는 쇼치쿠의 감독들
다나카 고기는 10년 전 <쇼치쿠 100년사>에 이어 올해 <쇼치쿠 110년사>의 발행 책임을 맡고 있다. 1955년 입사해 <조춘> 등 오즈 야스지로의 세 작품의 조감독을 거쳐 감독으로 활동하다가 제작, 영업에 두루 관여했던 그는 쇼치쿠의 산증인이다. 오즈 탄생 90주년인 93년엔 허우샤우시엔, 빔 벤더스, 스탠리 콴 등이 오즈에 대해 이야기하는 <오즈와 이야기하다>를 감독했고, 99년 오후나 촬영소의 폐쇄 당시에는 촬영소 역사를 담은 마지막 영상물을 만들기도 했다. 그가 전하는 쇼치쿠의 몇몇 감독들에 대한 사적인 기억과 평가.
혁신적인 오즈, 영상의 천재 기노시타 오즈 야스지로와 기노시타 게이스케_ “쇼치쿠에 입사 뒤 두달 만에 오즈조에 속하게 됐는데 이름 정도 들어봤지 영화는 본 적이 있어야지. 마침 집 주위에서 <도쿄이야기>를 재상영하더라고. 디테일은 잊었어도 밖에도 비가 오고 화면도 주룩주룩 비가 내렸던 일, 그리고 정말 해머로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던 건 기억해. 당시 젊은 입사자들 중엔 대학 영화연구그룹 출신이 많아 오즈에 대해 ‘낡았다’ ‘지루하다’ 했지만 난 처음부터 달랐어. 기노시타는 후배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멋쟁이 감독이었지. 젊은 조감독들과도 적극적으로 얘기하려 했고. 별로 후배와 교류가 없는 오즈와 비교될 수밖에 없었지.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어. 폴 슈레이더가 오즈에 대해 ‘자신의 형식’을 가진 이라 말했지만, 그건 누가 얘기해준다고 생기는 게 아니잖아. 기노시타는 영상의 천재라는 면에선 구로사와 아키라와 맞먹는다고 생각해. 언제나 새로운 방식으로 영화를 찍었지. 구로사와처럼 에너지는 없었지만, 오히려 관객에게 더 어필할 수 있는 영화였고. 쇼치쿠 전성기의 3대 감독이라면 오즈, 기노시타 그리고 시부야 미노루였는데 오즈는 워낙 각별한 존재였고 나머지 둘 사이의 경쟁심은 대단했어. 오후나 촬영소 근처에 둘 다 단골식당이 똑같았는데 그 조의 조감독들은 둘이서 마주치지 않도록 점심시간 잡느라 고생했지.”
군계일학의 재능 오시마, 학자 같은 감독 요시다 오시마 나기사와 요시다 기주_“누벨바그라 해도 오시마나 요시다 같은 이들 사이엔 강한 연대 같은 건 별로 없었어. 영화 경향도 다르고. 오시마가 쇼치쿠를 나간 건 이미 그전에 이마이 다다시 같은 사람들이 독립 프로덕션으로 활동하고 있었기에 그리 큰 충격은 아니었어. 하지만 쇼치쿠로선 아쉽지. 재능면에선 단연 오시마였거든. 난 오시마가 쇼치쿠에서 멜로를 찍었으면 굉장했을 거라 생각해. 쇼치쿠에서 맘대로 한편 찍으면 그 다음엔 회사 위해 하나 하고 이랬으면 좋았을 텐데. 요시다는 내 동기인데 반은 학자였어. 관념적인 영화들이 많았지. 오시마는 요시다처럼 관념적이지 않았어.”
쇼치쿠 시행착오의 상징 노무라, 아쉬운 재능 야마다 노무라 요시타로와 야마다 요지_“ 노무라는 <모래의 그릇> 같은 걸작이 있는가 하면 태작도 있고 기복이 심해. 뭐랄까 쇼치쿠 시행착오의 상징 같아. 재주로 치면 야마다보다 한수 위지만 재주가 많아 회사가 원하는 대로 너무 다양하게 만든 게 문제였지. 야마다는 훌륭한 작품들도 많은데 <남자는 괴로워> <학교> <가족> 같은 시리즈로만 알려진 게 안타까워. 물론 이 작품들이 쇼치쿠의 효자들이긴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