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실패한 사랑의 기억을 지우고 싶어한다. 그들도 처음엔 그랬다. 먼저 여자가 충동적으로 남자의 기억을 지워버렸고, 배신감을 느낀 남자도 여자의 기억을 지우려 한다. 문제는 멜로의 관객으로서 우리가 주인공의 이별을 바라지 않는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절박하게, 그 자신이 지나간 사랑과 추억을 되돌리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부터 그 남자, 조엘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무너지고 사라져가는 사랑의 추억들과 그것들을 부여잡는 남자의 안간힘을 접하게 된다. 그렇게 누군가의 의식과 무의식 위를 떠다니는 경험이란 것이 가능한 일일까. 의심스럽다면 이 조합을 눈여겨보라. 찰리 카우프만의 시나리오를 미셸 공드리가 연출했다. 의식과 무의식, 꿈과 현실, 현상과 실재의 분열과 융합을 즐겨 다루는 그들이 손을 잡았다. “망각한 자는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는 니체의 말이 ‘연애’의 실전에서 과연 유효한가, 하는 물음을 던지며.
<이터널 선샤인>의 도입부는 다소 혼란스럽다. 우연히 해안에서 만난 조엘(짐 캐리)과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럿)은 첫눈에 서로 끌린다. 적극적으로 대시하는 클레멘타인을 부담스러워하던 조엘도 겨울 강에서의 첫 데이트 이후 그녀에게 부쩍 호감을 느낀다. 그녀의 집 앞에서 기다리던 조엘은 걱정스런 얼굴로 다가와 “무슨 일이냐”고 묻는 한 남자(엘리야 우드)를 만난다. 조엘과 마찬가지로, 관객도 그 남자의 정체와 의도를 알지 못한다. 다음 장면, 난데없이 서글픈 눈물을 흘리며 차를 모는 조엘의 얼굴 위로 오프닝 크레딧이 뜬다. 우린 곧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헤어졌고, 클레멘타인이 조엘의 기억을 지워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조엘은 복수하는 심정으로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지우러 기억삭제연구소를 찾아가는데, 거기서 그가 묘사하는 클레멘타인과의 첫 만남은 우리가 앞서 보았던 장면과 일치하지 않는다. 서두의 에피소드는 그럼, 어디에서 온 것일까.
<메멘토> <돌이킬 수 없는>처럼 (그러나 부분적으로만) ‘역순 구성’을 도입한 <이터널 선샤인>의 전략은 옳았다. 가까운 기억부터 거꾸로 삭제당하는 경험은, 그것이 소멸된 (줄 알았던) 사랑의 감정과 관계에 관한 것일 때 더욱 안타깝게 마련이다. 상대에게 상처가 될 걸 알면서도 독설을 퍼붓던 폭풍 같은 파국을 지나고, 뚱한 침묵과 야멸찬 비난이 오가던 권태기를 거슬러, 죽어도 좋을 만큼 완전한 충족감이 있던 절정기에 이르면, 조엘처럼 “이 기억만큼은 남겨달라”고 절규할 법하다. 결국 처음 만나던 순간, 망설임과 설렘 속에서 사랑을 예감하던 그 순간에 다다르면 가슴이 울리는 깨달음이 찾아든다. “이젠 너무 익숙하고 안 좋아하지만, 그땐 멋있다고 생각했던” 클레멘타인의 오렌지색 티셔츠처럼, 누구나 강렬하게 매혹됐던 것들에 무뎌지고 날을 세운다. 인간의 유약하고 변덕스러운 본성, 반복되는 사랑의 실수와 실패, 찬란하고도 지리멸렬하게 이어지는 인생.
<이터널 선샤인>은 ‘헤어진 연인을 완전히 잊고 싶기도 하고, 영원히 기억하고 싶기도 한’ 연애 끝의 복잡다단한 상념이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들리고, 가슴으로 느껴지는, 놀라운 경험을 선사한다. 비욕과 벡 등의 뮤직비디오에서 실험적인 영상을 선보였던 미셸 공드리는 그렇게까지 ‘두드러지는’ 볼거리를 주지는 않지만, 누군가의 의식과 무의식을 ‘감각’하게 만드는 또 다른 경지를 선보인다. 사랑의 기억을 지우기로 하고서도 삭제 과정에 저항하는 조엘의 몸부림은, 집이 무너지고 사람을 사라지게 만드는 소거의 파도를 피하는 달음질로 표현되고, 현실의 사건사고에 영향받는 조엘의 혼돈스런 의식 세계는, 짐 캐리의 분신술과 몽환적인 이미지들로 그려진다. 연인의 기억을 간직하기 위해, 아무도 모르는 부끄러운 기억 속으로 숨어든다는 설정의 표현법도 흥미롭다. “특수효과가 적은 스펙터클영화”로 만들고자 했다는 공드리는, 이 대목에서 어린 시절로 돌아간 짐 캐리를 세트의 속임수로 작아 보이게 하는, (그래서 다소 유치하고 부자연스러운) 초창기 영화 제작방식을 동원했다. 이렇게 어린애의 놀이처럼 순진하게 유희하는 영상은 분절적이고 초현실적인 이야기 구성과 어우러지고, 형식과 내용은 서로를 돋우는 효과를 낳는다.
<이터널 선샤인>은 기억 소거 시술이라는 SF적 설정을 빌려왔지만, 그보다는 <사랑의 블랙홀>이나 <이프 온리>처럼 판타지가 가미된 로맨스에 가깝다. 혹은 뒤섞인 시간, 의식과 현상의 혼돈, 이성과 감정의 갈등이 휘몰아치는 여정이다. <존 말코비치 되기>를 본떠 ‘조엘 배리쉬 되기’라고 부제를 붙여도 좋을 이 영화는, 사실 사랑과 이별을 경험한 그 누구의 사연도 될 수 있을, 범상한 이야기다. 하지만 여태껏 누구도 이런 방식으로 사랑과 이별을 이야기한 적은 없었다. 괴짜 재담꾼 찰리 카우프만과 독특한 시각적 상상력의 소유자 미셸 공드리는 재기만 앞섰던 <휴먼 네이쳐>의 시행착오를 딛고, 대단히 감상적이면서도 성찰적인 사랑 이야기를 내놓았다. 어느 평자의 말처럼, 이렇게 “가슴을 무너뜨리는 동시에, 머리를 굴복시키는” 영화를 만난 적은 없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