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일본영화를 볼 수 없었던 탓에 우리에게 쇼치쿠는 그리 친숙한 이름이 아니다. 일본영화 개방 이후 오즈 야스지로와 쇼치쿠 누벨바그가 널리 알려졌지만 쇼치쿠는 국내에선 홍콩의 쇼브러더스(장철과 호금전의 무협영화)만한 인지도도 없는 영화사이다. 그건 지금의 일본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쇼치쿠의 전성기는 1930년대부터 50년대까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씨네21>이 쇼치쿠 110년을 특집기사로 다루는 것을 의아하게 여길 수도 있다. 왜 쇼치쿠인가? 간단히 답하자면 쇼치쿠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영화사이고 기라성 같은 감독들을 배출하고 수많은 걸작을 만든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그건 1990년대 한국영화가 꿈꿨던 어떤 이상을 쇼치쿠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쇼치쿠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 가운데 기도 시로라는 제작자가 있다. 1922년에 쇼치쿠에 입사한 그는 1924년 가마다 촬영소 소장이 됐고 능력있는 감독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인물이었다. 아직 가부키나 신파 등 연극적 전통에 의존하던 일본 영화계를 혁신, 미국영화 못지않은 수준으로 끌어올리자는 기치를 높이 들었던 사람이며 서민적 홈드라마를 쇼치쿠의 전매특허로 만든 제작자이다. 물론 그늘도 있었다. “쇼치쿠에 2명의 오즈는 필요없다”며 나루세 미키오를 밀어낸 일화는 유명하다. 오시마 나기사의 재능을 알아보고 파격적으로 감독 데뷔를 시켜놓고도 정작 <일본의 밤과 안개>가 나왔을 때 영화의 정치적 과격함에 놀라 사흘 만에 극장 간판을 내린 것도 그였다. 아무튼 기도 시로가 지휘하는 20∼30년대 쇼치쿠의 풍경은 꽤 신선했던 모양이다. 일본의 영화평론가 사토 다다오는 <일본영화 이야기>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도 시로 자신이 아직 젊고, 이러한 청년들이 형님뻘쯤 된다는 기분으로 소장실이 아닌 각 본부에 책상을 두고 거기를 젊은 감독과 각본가가 모이는 곳으로 하고 매일 의견을 교환하며, 기획을 논했다. 조감독 시절 사이토 도라지로나 오즈 야스지로는 스승인 오오구보 다다모토 감독의 작품을, 소장 앞에서 자신이면 이렇게 찍는다는 등 자유로이 말할 수가 있었고, 그 재기가 인정되어 감독으로 발탁됐다. 이런 자유로운 발언의 분위기가 신선한 기획과 기법을 낳고 많은 인재를 육성한 것이다.”
영화사에서 잊기 쉬운 존재가 제작자이지만 이처럼 쇼치쿠가 감독들의 스튜디오가 된 데는 기도 시로의 공이 컸던 것 같다. 같은 책에서 사토 다다오는 가마다 촬영소의 스타일에 대한 기도 시로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지금까지의 영화는 아직 뭐라고 해도 무대에서 온 것인데, 어쩔 수도 없는 하나의 도덕에 구속된 부자연스런 것이 많았다. 그래서 더욱 가까운 곳에서 소재를 찾아 리얼한 영화를 만든다는 게 우리들의 방침이었다. 서민의 입장에 서서,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주변의 일들을 통해, 인생의 진실을 직시하자. 기본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를 내 편으로 하고 소자본 중산계급을 격려하며, 부르주아의 반성을 촉구한다. 그러나 어두운 기분이 아니고 인생을 따뜻하게 희망을 갖는 밝은 눈으로 보려고 했다.” 기도 시로에겐 확고한 노선이 있었던 것이다.
요즘 한국영화 제작자나 투자자 가운데 이런 분명한 노선을 가진 사람이 몇명이나 될까? 그냥 흥행이 될 만한 영화를 하겠다거나 어떤 감독과 하겠다는 것 말고 어떤 변혁을 꿈꾸는 제작자 말이다. 1990년대 한국영화가 전성기 쇼치쿠처럼 꿈을 꾸는 제작자로 넘쳐났다면 가끔 요즘 한국영화는 쇠퇴기의 쇼치쿠처럼 기존 질서에 너무 고분고분한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상장을 위해, 주가를 높이기 위해 합종연횡하는 사이 영화사를 만들 때 추구했던 어떤 가치를 어딘가에 흘려버리지는 않았는지. 각각 다른 영화사 로고로 시작하는 영화들 사이에서 별다른 차이를 느낄 수 없는 요즘 한국 영화계를 보노라면 자연스레 이런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