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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판타지영화]애니미즘은 죽지 않는다
2001-02-14

<고질라> 시리즈에서 <쥬브나일>까지, 일본 판타지영화에 나타나는 민담과 전통신화 코드

다시 <링> 시리즈에 대해 이야기하자. 옛날 이야기 한편을 먼저 거론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일본의 아시카가 쇼군(將軍) 시대에 마쓰무라라는 관직자가 있었다. 한 흉가를 얻어 쓰게 된 마쓰무라의 집엔 작은 우물이 있는데 어느 날 밤부터 이 우물에서 귀신이 나타난다. 우물에서 튀어나온 귀신 탓에 마쓰무라 주변인 몇몇이 목숨을 잃고 마쓰무라는 귀신과 조우하게 된다. 여자 귀신은 억울한 사정을 고해바치고 도움을 청한다. 여기서부터는 뻔하다. 귀신의 말대로 우물을 파헤쳐 시신을 찾던 마쓰무라는 시체 대신 작은 거울을 발견한다. 귀신은 거울의 정령이었던 거다.

엉뚱하게 생각할 독자도 있을지 모르지만 일본 전래 ‘거울의 정령’에 관한 이 민담은 나카다 히데오 감독의 <링> 시리즈와 많이 흡사하다. <링> 시리즈에서 영화 내내 거울과 우물의 모티브가 흥미롭게 반복되었던 점을 상기하면 둘 사이의 유사성은 우연이라기보다 민담과 괴담에서 영화 주제를 끌어오는, 일본영화의 전통적 특징이 어딘가 은닉해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최근 국내엔 일본 판타지영화(구체적으로 분류하자면 더 세밀한 소장르로 나눌 수 있겠지만 편의상 판타지영화로 칭한다)가 여럿 공개된 바 있다. <고지라2000>에서 <쥬브나일>, 그리고 애니메이션 중에선 <포켓몬스터>, 그리고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등을 언급할 수 있다. 이들 작품들, 넓게 말하면 일본 판타지영화의 흐름을 단일하게 묶어줄 수 있는 것이 없을까? 일본 판타지영화는 거칠게 요약하면 캐릭터와 소장르의 발달사라고 칭할 수 있다. 주로 10대를 주요한 관객층으로 하면서 산업적 기반을 마련했으며 늘 새로운 캐릭터 개발을 통해 장르적 일관성을 유지하고 발전시킨 것이다. 이 글에선 일본 판타지영화의 흐름을 소개하면서 그들 판타지영화의 근저에 있는, 문화적 기원에 대해 짧막하게 논해보고자 한다.

괴수, 파충류, 킹콩의 전성시대

일본에서 판타지영화가 제작된 것은 1940년대로 거슬러올라간다. 투명인간이 등장하는 SF물과 괴담을 영화로 각색한 작품이 당시부터 만들어졌다. 이유가 특이하다. 세계대전 이후 일본에 상륙한 연합군, 특히 미군의 주도하에 일본 영화정책은 좌지우지되었다. 참바라영화, 즉 시대극영화는 1940년대 중반 일본에서 제작이 금지되는데 이러한 영화들이 “봉건적인 충성과 복수에 입각하고 있는 영화들이며 법률 대신 사적 복수가 용인되는”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시대극영화에 몰두하던 스탭들과 스타들이 판타지영화로 대거 발길을 돌리고 이후 일본영화는 판타지영화라는 대중영화의 시대가 도래한다.

1950년대 이후 일본 판타지영화는 몇 가지 소장르로 확실하게 구분된다. 먼저 <고지라>로 유명한 괴수영화가 있다. 흔히 특촬물(特撮物)로 불리는 괴수영화 장르는 혼다 이시로 감독의 1954년작 <고지라>를 시작으로 60년대엔 마찬가지로 혼다 이시로 감독의 거대한 나방 괴수가 출현하는 <모스라> 시리즈, 거북이와 파충류를 합성한 듯한 <가메라> 시리즈 등으로 부단하게 변형과 발전을 거듭하면서 최근에까지 이른다. 1990년대 가네코 스케 감독이라는 엔터테이너 연출자에 의해 부활한 <가메라> 시리즈는 혁신적인 몇 가지 요소로 주목받기도 했다. <고지라> 시리즈는 특촬물의 전형이라 할 만한 전통적 양식, 그러니까 자위대의 등장과 철탑, 송전선 등이 일종의 클리셰처럼 영화 배경 및 소품이 되는 공통점을 공유한다. 이에 비해 새로운 <가메라> 시리즈는 영화에서 ‘관객’의 시점과 지극히 일본적인 일상의 정밀함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차별화되었다. <가메라> 시리즈에선 도쿄 번화가를 누비는 괴수의 움직임, 여기에 덧없이 하나둘 희생되는 도시인들의 무력함이 시리즈마다 재차 반복되곤 한다. 평론가 이노우에 리사는 이를 두고 “가네코 스케 감독은 이 시리즈에서 극도로 리얼리즘에 입각해 강조된 일상에서 괴수라는 ‘기호’를 일종의 대재난으로 묘사했다”라고 평한 바 있다.

이 밖에 일본 판타지영화는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제작된 호러영화, 주로 만화와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SF영화, 그리고 전래된 이야기를 영화로 각색한 괴담영화 등이 전체적인 윤곽을 형성한다. 앞서 언급했듯 일본 판타지영화의 역사는 곧 캐릭터의 변화무쌍한 변천사이기도 하다. 붉은색과 은색이 섞인 우주복과 헬멧으로 무장한 울트라맨(울트라맨이 지구 대기중에서 3분밖에 활동할 수밖에 없다는 설정은 제작비 부담이 적지 않은 원인이다), 문어와 공룡, 그리고 설인과 킹콩까지 동원한 괴수영화들, 그리고 최근의 <쥬브나일>의 ‘테트라’라는 로봇과 <포켓몬스터>의 ‘피카츄’에 이르기까지. 이같은 일본 판타지영화의 흐름과 그 주인공들을 일본이라는 특유의 공간이 낳은 문화적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모든 사물에는 영혼이 깃든다

“인간이 이룬 최초의 세계관, 곧 애니미즘의 세계관은 심리학적 세계관이었다. 고대 인간들은 세계의 사물이 무엇과 유사한지 스스로 느낀 것으로 알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자신들 마음의 구조적 조건을 외부세계로 전치시켰음을 예측할 수 있으며 역으로 우리는 애니미즘이 사물의 본성에 대해 가르쳐주는 것을 거꾸로 인간 영혼에 적용시킬 수 있다.” 프로이트는 <토템과 타부>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썼다. 애니미즘은 좁은 의미로는 영혼 관념에 관한 이론이고 넓은 의미로는 영적 존재에 관한 이론이다. 이는 애니머티즘과 동물숭배, 그리고 정령숭배로 분류되기도 한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애니미즘이 하나의 신앙 형태로 남아 있는 사례다. 바로 ‘신도’(神道)라는 토착신앙이 그것이다. 일본 판타지물의 기원은 신도라는 일본 토착신앙이나 혹은 민담에 기원을 두는 경우가 잦다. 신도의 경우는 일본에 불교가 전해지기 전까지 유일한 신앙이었으며 샤머니즘 성격이 짙은 종교다. 신도는 다른 종교와 달리 특정한 종교적 체계가 없으며 만물에 영혼에 깃들어 있다는, 즉 ‘가미’(神)를 숭배하는 종교라 정의할 수 있다. 원래 샤머니즘에 근접해 있던 신도는 이후 선조를 숭배하거나 천황에 대한 신격화 작업으로 이어지면서 본래 성격이 변질되긴 했으나 일본 고유의 토착신앙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다. 일본사와 일본문화를 접목하는 시도는 서구권에서도 꾸준했는데 권위있는 학자로는 안토니아 레비를 들 수 있다. 안토니아 레비는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창조물이 해외관객에게 생소하게 생각되는 이유는 그들이 완전히 색다른 문화적 전통에서 끌어낸 그들만의 소재를 작품에 응용하기 때문이다”라고 분석한 바 있다.

안토니아 레비가 신도와 일본문화 사이 접점이라고 파악한 것은 이미지다. 검과 보석, 그리고 거울 같은 이미지가 좋은 예로, 그는 이같은 이미지가 신도 신화를 방증하는 주요한 예이며 일본 선사시대를 상징하는 물품이라고 봤다. <천지무용!> 같은 작품이 안토니아 레비가 자신의 견해를 입증하기 위해 거론한 예다. 이는 판타지영화 영역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고지라> 시리즈 역시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있는데 고지라 캐릭터는 시리즈 내내 정체가 불분명하며 때로 인간들에게 해로운 파괴행위를 행하지만 가끔은 인간들 편에서 선을 옹호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극히 모호하다. 선과 악 사이의 모호성으로 일관하는 고지라는 실상 ‘신마’(神魔)라는 신도의 개념, 즉 신과 악마의 중간자로 일본인이 영혼을 사고했던 맥락으로 이해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다. <포켓몬스터> 역시 비슷한 해석이 가능하다. <포켓몬스터>의 캐릭터들은 일본 괴수영화의 맥을 그대로 잇고 있는 것으로 봐도 무방한데, 단지 상품성과 귀여운 외양이 강조된 것이 차이점이랄까. 선악 사이 경계선에 서 있다는 점도 유사하다. 극장판 <포켓몬스터>에서 뮤츠의 흉계로 만들어진 포켓몬스터의 복제물들은 마치 악의 세력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 입장에선 자신들 존재를 입증하기 위한 정당한 싸움을 하는 것일 따름이다. 신도에서 초월적 존재, 혹은 영혼적 존재를 사고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대목이다.

민담의 주인공이 영화 속 캐릭터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선 ‘청정과 오염’이라는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먼 미래사회에 인류는 곰팡이숲과 괴상하게 생긴 곤충들로부터 벗어나 자신들만의 영역을 개척한다. 여기서 나타나는 청정과 오염이라는 대립항 역시 신도에서 빌려온 것으로 일본 전통신앙 신도에서 청정은 곧 ‘신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서구 신화와 일본의 신도를 얼마나 절묘하게 엮어나갔는지 깨닫기 충분하다. 일본 민담엔 ‘덴구’(天狗)라는 흥미로운 존재가 나온다. 신통력이 있으며 공중을 자유롭게 뛰어다닐 수 있으며 장난기 많은 괴물이다. 많은 전통 민담 속에서 덴구는 때로 사람을 골탕먹이기도 하며 둔갑하는 능력도 과시한다. ‘덴구’라는 민담 속 존재는 아마도 일본 SF영화에 나오는 기계로봇 캐릭터의 원형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둔갑술도 부리며 인간의 친구이자 이따금 장난기가 동하는 <쥬브나일>의 테트라를 민담에 등장하는 덴구의 이웃사촌 정도로 본다면 일본 판타지영화를 보는 시선도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한국의 판타지영화는?

무릇 판타지영화는 욕망에 관한 장르다. 영화를 보는 이의, 혹은 만드는 이의 무의식 속 욕망을 마음껏 스크린에 풀어놓는다. 일본 판타지영화가 다양한 갈래로 소장르들을 뿌리내리고 각 시대에 맞는 캐릭터를 끊임없이 개발했다는 점은 명백하다. 그리고 이러한 판타지영화가 기실 그들만의 독자적인 문화적이고 민속적인 기원을 두고 있음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어차피 욕망이란, 무의식 속 욕망이란 지역적 특색과 더불어 명백한 원형적 모티브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내 판타지영화는 어떨까. <용가리>와 <가위>, 그리고 몇몇 판타지멜로영화들은 어떤 관점에서 읽는 것이 가능할까? 이에 대한 답변에 앞서, 한국영화의 판타지 전통이 얼마나 든든한 역사와 창의성을 지니고 있는지 고려해본다면, 답신을 보내기엔 좀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김의찬/ 영화평론가nuage01@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