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연기밖에 모르는 분이었지. 돌아가신 날도 그랬어. 축구대회에 나오셨는데, 아침을 안 드셨다기에, 내가 우유랑 카스테라를 사드렸어. 전날엔가 밤샘 촬영을 하셨다고 해서 뛰다가 몸이 조금이라도 안 좋으시면 손을 드십시오, 했지. 교체해드리겠다고. 그때 연예인들이 축구를 한다니까 서울운동장에 관중이 한 2만명 모였어. 그런데 형님이 경기장에 들어가시더니 계속 헛발질을 하시는 거야. 지금 생각하면 그때부터 이미 심장이 멈추기 시작한 거지. 그런데도 그 많은 관중은 그게 허장강의 코미디 연기라고 생각하고 폭소를 터트렸다고. 박수까지 쳐가면서 말이야. 몸이 식어가는 순간에도 대중의 환호를 받은 분은 형님밖에 없을 거라고. 그게 마지막 연기였던 셈인데, 그래서 슬퍼.”
“숨을 거둘 때까지 여전히 배우였다”는 동료배우 이해룡씨의 회고는 “천의 얼굴이라 불렸던” 허장강에 대한 당시 대중의 아이러니한 애정을 생생히 일러준다. 1975년 9월21일, 축구대회 도중 호흡장애를 일으켜 52살의 나이로 세상을 뜬 허장강은 주연보다는 조연으로, 선인보다는 악인으로 더 빈번하게 스크린에 등장했다. 그러나 ‘코주부 허장강’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언제나 남달랐고 특별했다. 혹시 “마담 우리 심심한데 뽀뽀나 한번 할까”를 아시는지. 그가 스크린에 던진 대사는 언제나 회자되는 유행어가 됐다. 악역을 도맡았던 그가 스크린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을 때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극장에 모여든 관객이 일제히 기립해 환호했다는 기억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온다.
11월1일부터 6일까지 서울 서초동 한국영상자료원 고전영화관에서 열리는 ‘그리운 악역 허장강전’은 당시 대중이 왜 허장강을 그토록 애증의 아이콘으로 삼았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귀한 자리다. 전후 한국영화의 소생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뒤 1975년 이상언 감독의 <조약돌>까지 1천여편(한국영상자료원의 기록에선 출연작 365편만을 확인할 수 있다)에 달하는 작품을 남기고 세상을 뜬 허장강. 그의 배우로서의 스펙트럼을 일일이 눈으로 일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이번에 상영되는 14편의 영화를 통해 악역 전문 배우 혹은 액션 단골 배우라는 꼬리표를 붙여 배우 허장강을 손쉽게 통칭하는 후대의 게으름을 자각하기란 어렵지 않다.
악극에서 10년, <아리랑>으로 영화계 입문
중학교에 다닐 무렵부터 “틈만 나면 아이들을 불러모아 신파극 놀음을 하곤 했던” 허장강은 처음부터 배우로서의 끼를 발휘하진 못했다고 한다. 8·15 해방과 함께 성년이 된 그는 국도극장의 성보가극단에 입단 시험을 치렀으나 떨어졌고, 하나(化)가극단에 연구생으로 들어갔으나 도중하차했다. 이후 증권회사의 외무사원으로 생계를 잇던 그는 극단 백마산을 조직해서 <황토를 찾는 사나이>를 무대에 올렸지만, 흥행에서 다시 쓴맛을 봤다. 악극인 박구를 따라 반도가극단에 연습생으로 입단하면서 “본격적으로 연예 생활을 시작한” 그는 “노숙과 기식을 하면서도” 악극을 놓지 않았고, 악극 <계월향>에서 소서행장 역을 맡아 첫 무대에 선다.
10년 가깝게 악극배우였던 허장강을 은막으로 끌어들인 이는 이강천 감독이다. 정극 출신이 아니더라도 구분하지 않고 “악극 계통의 연기자들을 적극적으로 데뷔시킨” 이강천 감독의 <아리랑>(1954)에서 영진 역할로 나왔던 허장강은 이듬해 <피아골>(1955)에서 성적 욕망과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동지를 능욕하고 급기야 살인을 저지르는 빨치산 역을 맡아 대중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 포연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한국전쟁 직후. 갈기머리를 한 채 개머리판을 들어 동료를 내리치고, 눈을 헤뒤집고선 실실 흘리는 그의 광기의 웃음을 카메라는 오래 비추지 않지만 섬뜩하다. 이후 <눈 내리는 밤>(1958)의 아편쟁이를 비롯해 <죄없는 청춘>(1960) 등에서 악역을 도맡은 그는 1960년대 들어서기 전까지 ‘악의 상징’으로 남는다.
예나 지금이나 대중의 머릿속에 각인된 이미지를 벗겨내기란, 또 그것이 선연하고 또렷할수록 더더욱 쉽지 않은 일이다. 양주남 감독의 <종각>(1958)에서 허장강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종을 만들려는 전설적인 장인 석숭으로 나오지만, 관객의 반응은 차가웠다. 그런 그가 “특유의 애교를 발휘하며” 대중에게 한 걸음 다가서기 시작한 건 1961년, 이형표 감독의 <서울의 지붕밑>과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 등에서 코믹한 역할을 맡게 되면서부터다. <서울의 지붕밑>에서 젊은 여인네의 속살을 훔쳐보거나 꼼수로 친구를 골탕먹이는 데 재미들린 인도철학 관상쟁이 박 주사로 나오는 그는 간살맞은 표정과 묘한 콧소리가 일품이다. 신상옥 감독 또한 “방자와 향단으로 나온 허장강, 도금봉이 춘향과 이 도령 역할을 맡았던 김진규, 최은희와 앙상블을 이뤘기 때문에 흥행에 성공했다는 훗날의 평가는 헛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그의 인간미 넘치는 캐릭터들은 이번 회고전의 상영작 중 한편인 김승옥 감독의 <감자>(1968)에서도 엿볼 수 있다. 복녀를 아내로 맞아들인 뒤 생계는 뒷전이고 잠만 자는 베짱이 남편으로 나오는 그는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한심한 인물이지만, “젠장”을 반복 후렴구 삼아 태평가를 부르는 그의 표정은 여간 매력있는 게 아니다. 이만희 감독의 <쇠사슬을 끊어라>(1971)의 허달간 또한 마찬가지다. 일제시대 밀정 노릇을 하며 조선 사람을 괴롭히고 미색에 빠져 있는 인물이지만, 그에게 쉽사리 돌을 던지기란 쉽지 않다. 호피옷 입고 빨간 스카프 날리며 만주 벌판을 헤집는 허달간에게선 반영웅의 향취까지는 아니라도 좀처럼 거부할 수 없는 자력이 있다.
“커다란 키에 길쭉한 얼굴, 그 긴 얼굴에 어울리게 길고 큰 코, 짙고 두꺼운 눈썹, 봉싯한 입술 모습, 조금씩 비정상인 것 같은 이목구비가 묘한 균형을 이루며 특이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영화> 1975년 10월호) 한 부음 기사의 첫머리에 그의 외모에 대한 평가가 등장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영화평론가 김종원은 “그에게 주어진 캐릭터들은 철저하게 비주류였다. 하지만 독특한 외모를 더해 그는 항상 기대 이상의 인물을 만들어냈다. 다른 악극단 출신 배우들과 달리 그는 오버 연기를 하더라도 진짜처럼 보였다. 그게 그의 힘이었다. 한국 영화계의 한계 때문에 다양한 역할을 맡진 못했지만, 깊이만큼은 누구한테도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평가한다. 정진우 감독도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다른 배우들과 달리 그는 감독이 잡아주지 않아도 제 캐릭터를 찾아가는 몇 안 되는 배우였다”고 덧붙인다.
<감자> <메밀꽃 필 무렵> 등 너스레와 악인은 사라지고
이같은 후한 평가가 가능했던 건 아마도 영화에 대한 그의 열정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수염 붙이는 스프리껌이라는 게 있는데 아버지는 좋은 제품 구하러 일본에 직접 다녀오시기도 했고, 내가 학교에서 일찍 돌아오면 아버지는 어린 저를 데리고 대본 연습을 했어요.” 아들 허준호의 유년 시절 기억을 끄집어내지 않더라도, 그의 열정을 확인하기란 어렵지 않다. 고응호 감독은 “하루에도 몇번씩 촬영장을 오가던 가께모찌가 성행했지만, 그는 촬영시간에 늦지도 않았고, 부족한 잠을 때우는 게 보통이었는데도 언제나 스탠바이해야 한다며 촬영 1시간 전 대기 원칙을 스스로 만들어 지켰다”고 말한다. 당시에는 후시녹음 때 성우가 출연배우의 대사를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 어디 가십니까”라는 간단한 대사조차 허장강은 본인이 직접 해야 직성이 풀렸다고 한다.
허장강의 출연작들을 보면, 직접 설정한 듯한 디테일한 연기들이 눈에 띄는데, 숨은 그림 찾기 하는 재미가 있다. 손님들 눈치를 슬쩍 보고서는 금세 맥주병 받쳐 들고 꼿꼿하게 걸어가는 바텐더(<명동잔혹사>(1975)나 미리 준비해둔 손수건으로 과부의 눈물을 슬쩍 훔쳐주는 박 주사(<서울의 지붕밑)는 배우 스스로 계산하고 연습한 설정이 아니었다면 자연스러운 전달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분례기> 때 허장강 선생님이 연기를 그렇게 많이 가르쳐주셨어요. 자갈치시장을 간다고 그러면, 거기서 한 사람 한 사람 인물을 놓치지 말라고 그러셨어요. 네가 당장 그 역할을 안 하더라도 항상 머리에 담아두라고, 항상 신경 쓰라고 했어요”라는 윤정희의 회고는 그의 열정을 증명하는 증언이다.
굳이 거칠게 분류하면, 허장강은 <메밀꽃 필 무렵>(1967)을 기점으로 “본격 연기에 뛰어든다”. 이번 상영작 중 몰랐던 허장강의 새로운 면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은 이성구 감독의 <지하실의 7인>(1969)이나 이만희 감독의 <영시>(1971)일 것이다. 이들 작품에서 허장강의 주특기인 너스레를 찾아볼 순 없다. 대신 그는 극한 상황에서 고독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인물로 나온다. <만선>(1963)에서 허장강에게 진지한 역할을 맡긴 적 있던 김수용 감독은 “자신에게 씌어진 고정 이미지 때문에 몹시 힘들어했다. 개런티를 싸게 받더라도 어떻게든 다른 걸 해보려고 했다”면서 “<굴비>(1967) 촬영 때 김승호와 함께 출연했는데 어떻게든 차별점을 내보이려고 애쓰더라니까”라고 전한다.
“내 팔자에 딴따라해서 이만하면 됐지 뭘 또 바라겠어.” 허장강은 어쩌면 한국영화의 틈에서 피어난 생명력 강한 잡초인지도 모른다. 김수용 감독은 “정확하게 말하면 허장강은 자신의 노선을 선택할 기회가 없었지. 그 얼굴로 멜로배우를 할 수 있었겠어? 장동휘, 황해처럼 본격 액션배우로 남지도 못했고. 또 김승호나 김진규처럼 정통파 배우로서 자신을 드러내지도 못했다고. 하지만 그 틈에서 허장강은 누구 것도 아닌 제 것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싶어.” 14편의 영화만으로 배우 허장강에 대한 허기가 달래지지 않는다면, 아들인 허기호씨를 비롯해 이형표, 구봉서, 이석기, 김종원, 조영정 등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과 후학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심포지엄까지 챙겨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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