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잡이배를 타고 나갔다가 몇달 만에 돌아온 석준은 자신의 애인이 용길에게 겁탈당한 뒤 자살했음을 알게 된다. 석준은 용길을 죽이려 하지만 실패하는 대신 살인미수죄로 장기간 복역한다. 이를 갈며 출옥한 석준은 곧바로 용길이 숨어산다는 설악산을 향해 출발한다. 그동안 참회의 삶을 살아온 용길은 현재 염주골대피소의 산악구조대원이다. 그러나 운명은 얄궂다. 용길을 찾아헤매던 석준은 칼바위에서 실족해 산악구조대의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다. 자,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이희우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메아리>의 스토리라인이다. 잘 다듬어진 캐릭터를 연기한 이영하와 김동현의 연기도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화려하고도 웅장한 설악산의 비경들이 스크린을 압도했던 수작이다. 어리석은 인간들의 희로애락을 말없이 품어주는 큰 산의 이미지야말로 그가 이 작품을 통해서 표현하고 싶었던 그 무엇이 아니었나 싶다.
이희우는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다음 서른살 무렵부터 줄기차게 시나리오를 써온 정통파 시나리오작가다. 데뷔작은 이만희 감독의 <여자가 고백할 때>. 유학중인 남편의 귀국이 늦어지자 젊은 조각가와 사랑에 빠진 아내가 그 사실을 고백하면서 맞게 되는 결혼생활의 파국과 화해를 다룬 범상한 멜로다. 이듬해 만들어진 <세상만사 뜻대로>는 김희갑과 황정순 그리고 주제가를 부른 김희준이 출연한 가족영화. 1970년대 초반에 크게 히트했던 <팔도강산> 시리즈의 원형에 해당한다. 이후 이희우는 최근작인 <성애의 침묵>에 이르기까지 100편에 육박하는 시나리오를 써왔는데, 그 작품세계가 너무 방대한 동시에 다양하여 필모그래피 전체를 꿰뚫는 하나의 키워드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거칠게나마 몇개의 유형으로 나눠볼 수 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이른바 ‘계몽영화’ 부류다. 전직검사와 음악도 출신 여순경이 고아원의 거친 아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전국음악대회에서 일등을 차지한다는 내용의 <마음은 푸른 하늘>, 고향 개발을 위한 두 형제의 고군분투를 그린 <두 형제>, 좌절한 벙어리 청년이 제화기능공이 되어 국제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과정을 그린 <빨간 구두>, 전과자의 헌신적인 지도로 용접부문 금메달을 움켜쥐게 되는 <개선문>, 뇌성마비 소년이 입으로 그림을 그려 어린이 그림대회에 입상한다는 내용의 <돛대도 아니달고>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일견 유신정권하에서의 ‘건전가요’를 연상시키는 내용들이지만 적지 않은 관객을 동원했고 나름대로의 순기능도 무시할 수 없다.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 ‘하이틴물’ 혹은 ‘고교물’이라는 장르가 대거 득세하는데 이희우 역시 이 방면에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별항의 필모그래피에서는 생략했지만 <푸른 교실> <친구 사이야> <소녀의 기도> <선생님 안녕> <첫눈이 내릴 때> <여고 얄개> <고교 깡돌이> <우리들의 고교시대> 등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명현숙, 임예진, 김정훈, 진유영, 이승현 등이 이 장르가 낳은 스타들이다.
이희우는 소설작품의 각색에서도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조해일의 <왕십리>, 조선작의 <미스양의 모험>, 한수산의 <마지막 찻잔>, 이병주의 <삐에로와 국화>, 정을병의 <이브의 건넌방> 등이 모두 그의 시나리오를 통하여 스크린으로 옮겨진 당대의 수작들이다. 오리지널 시나리오는 주로 멜로와 에로에 집중되어 있는데, <청녀> <절정> <사랑 그리고 이별>이 전자를 대표한다면 대단한 흥행성적을 올렸던 <매춘>과 <성애의 침묵>이 후자를 대표한다. LA를 배경으로 실비아 크리스텔과 유혜리가 농도 짙은 연기를 펼쳐보였던 <성애의 침묵> 이후 이희우의 필모그래피가 침묵상태로 들어간 것은 그가 방송사로 활동영역을 옮겼기 때문이다. 최근 수년간 안방극장의 채널을 고정시켜온 <딸부잣집> <며느리 삼국지> <형제의 강> <마음이 고와야지> <덕이> 등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환갑을 넘어섰지만 여전히 왕성한 필력을 자랑하는 현역작가로 손꼽히는 그는 현재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으로 재직중이다.
심산/ 시나리오 작가 besmart@netsgo.com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69년 이만희의 <여자가 고백할 때>
1970년 정인엽의 <세상만사 뜻대로>
1971년 신성일의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1972년 이만희의
1973년 박태원의 <마음은 푸른 하늘>
1974년 이만희의 <청녀>
1975년 이성구의 <빨간 구두>
1976년 임권택의 <왕십리> ★
1977년 김응천의 <미스양의 모험>
1978년 최하원의 <절정>
1979년 정소영의 <마지막 찻잔>, 이원세의 <돛대도 아니달고>
1980년 최하원의 <메아리> ★
1981년 이원세의 <그대 앞에 다시 서리라>
1982년 김수용의 <삐에로와 국화>
1983년 변장호의 <사랑 그리고 이별>
1987년 변장호의 <이브의 건넌방>
1988년 유진선의 <매춘> ⓥ
1992년 정인엽의 <성애의 침묵> ⓥ
ⓥ는 비디오 출시작
★는 자(타)선 대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