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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리얼리티를 꿈꿨지만
2001-08-01

남은 건 CG, 잃은 건 우연의 아우라

● 1851년 5월1일 런던 하이드파크로 가는 길은 분주히 걸어가는 50만명의 사람들로 가득 찼다. 유리와 쇠로 만들어진 ‘수정궁’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리는 걸 보려는 사람들이었다. 박람회는 ‘인류의 진보’를 상징했다. 사람들은 정교한 양탄자와 레이스가 전시된 ‘중세의 궁정’을 칭찬하면서도 서둘러 발걸음을 옮겨 차갑게 빛나는 증기기관이나 인쇄기쪽으로 갔다. 진보는 가장 아름답고 선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현재에 매혹되었고 빛나는 미래를 믿었다.

지금은 증기기관을 아름다움의 표준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기계의 편의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영등포 자재공장의 유압 절단기를 보면서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수정궁에서 무시되었던 섬세한 수제 물품의 가치는 여전하다. 법정근로시간이 주당 33시간인 프랑스인들은 하루에 두개도 만들 수 없는 에르메스 켈리백의 웨이팅 리스트는 3년 이상이고, 제3세계 어린이들의 앙상한 손가락으로 만들어진 니트 드레스는 20대 청년 줄리언 맥도널드를 순식간에 패션계의 기린아로 만들었다. 하지만 기술에 대한 숭배는 여전하다. 그리고 늘 그랬듯이 과도한 찬미와 연결되고 있다. 그을음이나 기름때와는 관계없는 새로운 기술이 다시 한번 미적 가치의 표준이 되고 있다.

만국박람회로부터 150년이 지난 지금, 영화 <파이널 환타지>가 개봉되었다. 게임제작사로야 유명하지만 영화는 처음 만드는 ‘스퀘어’로서는 과도할 정도로 관심이 집중되었다. 피와 살이 있는 배우들은 이제 존재 의미를 잃었다고 호들갑스럽게 얘기하는 사람이 있고, <파이널 환타지>를 통해 영화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많은 기사들 중 영화로서의 <파이널 환타지>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 CG에 대한 놀라운 찬사로 일단 도배된 뒤, ‘그만하면 블록버스터치고 내용에도 충실하다’는 정도가 영화평의 전부다.

‘스퀘어’는 영화 같은 게임을 추구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영화를 직접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파이널 환타지>는 영화로서의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파이널 환타지>에 쏟아지는 찬사는 100% CG에 대한 것이다. 만일 CG가 아니라면 어떤 평을 들었을가? 지금처럼 주목을 받으며 신문이나 잡지에 대서특필될 수 있었을까? <씨네21>의 영화읽기 작품으로 선정될 수 있었을까?

<파이널 환타지>가 `씨그래프`같은 CG 기술 컨퍼런스에 출품되었다면 기립 박수 속에 상을 받았을지 모른다. 그 상의 권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라은 단 한명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파이널 환타지>는 영화다. 실사영화를 대신할 수 있는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근본적인 문제에 말려들었다. CG영화가 실사영화가 줄수 있는 것을 전부 제공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스퀘어가 원한 것과 착각한 것

<파이널 환타지>가 <씨그래프> 같은 CG 기술 컨퍼런스에 출품되었다면 기립 박수 속에 상을 받았을지 모른다. 그 상의 권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파이널 환타지>는 영화다. 실사영화를 대신할 수 있는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근본적인 문제에 말려들었다. CG영화가 실사영화가 줄 수 있는 것을 전부 제공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스퀘어는 일본을 대표하는 제작사다. 게임 <파이널 판타지>는 엄청난 부와 명성, 열성적인 팬덤, 평론가의 지지와 찬사 중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았다. 스퀘어의 화려한 그래픽과 감동적인 스토리, 뛰어난 연출을 따라올 제작사는 없었다. 드라마틱한 연출에 반한 수백만 게이머의 환호를 받으며 스퀘어는 더욱더 영화 같은 게임을 만들겠다는 야망에 사로잡혔다. ‘시네마틱 RPG’라는 새로운 용어가 등장했고, ‘스퀘어 USA’를 설립해 미국 CG 전문가들을 끌어들였다. 이들의 첫 작품이 <패러사이트 이브>다. 계속 갈고 다듬은 솜씨는 <파이널 환타지8>과 <크로노 크로스>의 동영상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결국 영화 같은 게임은 결국 영화 자체를 만들겠다는 꿈으로 이어졌다. 영화 <파이널 환타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보호 구역을 침범한 외계 생명체를 피해 도망친 아키가 별이 가득한 우주를 내다보는 장면에서 그녀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그녀의 피부는 별로 매끄럽지 않다. 눈 밑에는 짙은 기미가 끼어 있고 잔주름이 자글자글하다. 실사영화라면 완벽하게 메이크업을 할 뿐 아니라 따로 CG 작업을 통해 보완했을 것이다. 닥터 아키는 노메이크업이다. 이 장면은 스퀘어가 추구한 게 무엇이었는지 완벽하게 보여준다. 그들에게 ‘리얼리티’는 ‘리얼’한 것이다. 실사영화에서 감췄을 부분까지 그대로 살려내는 정열을 추구했다.

불행하게도 스퀘어는 착각을 했다. 리얼리티는 리얼하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극사실주의 미술 작품을 보면 오히려 리얼리티를 느낄 수 없다. 사진보다도 더 정교하고 정확하게 재현된 현실은 보는 이에게 극도의 비현실성을 제공한다.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것을 눈앞에 들이밀어서 상황을 비현실적인 경험으로 몰아간다.

리얼리티의 경험은 수용자가 주어진 상황에서 ‘존재함’을 느낄 때 획득된다. 영화가 스펙터클을 통해 제공하는 건 허구에 불과하지만 관객은 그 허구 속에 자신이 속해 있다고 느낀다.

맹렬하게 굴러오는 바위를 피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인디아나 존스를 본다. 바위는 혼자서도 들 수 있는 가짜 바위고 주인공이 죽을 리는 없다는 걸 뻔히 다 알다. 하지만 손이 땀으로 축축해지고 혀가 바짝 마른다. 해리슨 포드가 아니라 CG로 만들어진 인디아나 존스라도 그랬을까?

가짜 스너프 필름을 보면서도 머리가 하얗게 되고, 숨을 쉴 수 없는 건 특수효과가 너무나 정교하기 때문이 아니다. 가짜인 게 분명한 조잡한 특수효과에도 불구하고 리얼리티를 경험하는 건, 그 모든 일들이 피와 살을 지닌 사람에게 행해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훨씬 많은 피가 흐르고 대수롭지 않게 사람이 조각나더라도 애니메이션이라면 그만한 공포와 숨막힘을 경험하지 못한다. 배경뿐 아니라 인물도 CG라는 걸 인식하는 순간, 몸 속에 방어기제가 생겨난다. 영화 속의 캐릭터와 우리 자신을 구별짓는 경계선이 설정된다.

의도하지 않은 노이즈의 매력이 없다

영화를 보면 대개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험을 한다. 다시 말해, 주인공은 나를 대신해 거기 ‘존재’한다. 영화를 보면서 경험하는 리얼리티는 그렇게 완성된다. 반면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못하게 하는 방어기제가 생겨난다면 존재를 대신 경험하게 해주는 시스템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리고 수용자가 그 상황에, 그 현장에 존재하지 못한다면 영화에서 리얼리티를 경험할 수 없다.

반면 게임에서는 배경에서 인물까지 완벽하게 CG로 구성되었더라도 리얼리티를 경험할 수 있다. CG의 수준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10년 전 8비트 게임기에 사용되는 조잡한 캐릭터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잘 만든 게임에선 CG가 리얼리티를 경험할 수 없게 하는 방어기제로 작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게임은 인터랙티브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게이머가 친히 손을 움직여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세계가 성립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는다. 게임에선 다른 주체를 통해 ‘존재’를 경험할 필요가 없다. 게이머가 직접 주체가 되어 ‘존재’를 경험한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영화는 한번 보고 끝이지만 게임이 몇십 시간, 때로는 몇백 시간까지 사람들을 붙잡아놓을 수 있는 건, 어느 정도는 리얼리티 생산 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스퀘어가 착각한 건 이 지점에서다. <파이널 환타지>는 영화다. 그런데 게임처럼 만들어졌다. 이미 인터랙티브성을 잃었는데도 CG 주인공으로 인한 방어기제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했다. 현실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사실적인 그래픽만 있으면 실사영화가 주는 리얼리티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는 증명되지 않은 가설이다. 스퀘어의 실패는 충분히 사실적이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두운 장면에선 실사영화와 구별하기 힘들 정도였지만, 밝은 장면에서 유난히 흰 피부의 아키의 모습은 실제 배우와는 어딘가 달랐다. 실사와 CG가 전혀 구별되지 않을 정도까지 기술이 발전하면 CG가 방어기제를 발동시키는 원인이 되지 않을지 모른다. 최후의 한걸음을 마저 내딛는다면 스퀘어의 전략은 눈부신 승리를 거둘지 모른다.

하지만 <파이널 환타지>에는 여전히 치명적인 약점이 남아 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파이널 환타지>를 다시 한번 반추해 보려는데 무척 당황했다. 블록버스터든 소박한 홈코미디건 최루성 멜로물이건간에 영화를 보면 인상적인 장면이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파이널 환타지>의 경우, 얼마나 놀라운 CG였는지, 전체 스토리가 대강 어땠는지는 기억나는 반면 강렬한 임팩트를 가진 한 장면이 없었다.

정교하게 구성된 영화든 마구잡이로 이어붙인 영화든 영화를 보면 수많은 기획으로 만들어진 것들, 의도적으로 보여주려고 한 것들뿐 아니라, 다른 것들도 보게 된다. 스탠리 큐브릭이 아무리 편집광이라도 주인공이 고개를 흔들 때 머리카락 한올 한올이 그리는 곡선까지 통제할 수는 없다. 더구나 배우가 내뿜는 오라, 감독은 물론 배우 본인조차 의식하지 못한 부분들은 영화를 풍부하게 한다.

극사실 CG는 이야기와 배역을 추상적으로밖에 전달하지 못한다. 닥터 아키의 껍데기가 좀더 완벽해지더라도 아키 역을 맡은 배우의 오라는 없다. 영화 속에는 스탭진이 의도하지 않은 부분이 없다. 사실과 사건은 전달되지만 그걸 풍부하게 하는 구체성, 혹은 의도하지 않은 노이즈를 느낄 수 없다. 최후의 한걸음은 더욱 완벽한 공허함을 창조할 것이다.

증기기관이 미의 기준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파이널 환타지>의 놀라운 CG는 미의 기준이 아니다. 하지만 증기기관이 인류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편의를 주기는 한다. CG의 미래는 인류에게 많은 즐거움을 제공해줄 것이다. 어쩌면 지능과 감정을 지닌 CG 배우나 현실에서나 똑같이 ‘의도되지 않은 상황’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진보’가 미의 기준이 되지는 않을 거라고 일단 고집해 본다.

박상우/ 게임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