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박을 소재로 한 영화는 언제나 재미있다. 모두들 안녕히 알고 계시는 바처럼, <라운더스> <리노의 도박사> <카지노> <허슬러> 등의 목록표는 도박에 심취하되 그것을 뛰어넘은 감독들의 서늘한 시선이 놀라운 영화들이다. 도박 자체의 스릴에 영화적 긴장까지 더한 셈이니 히든 카드를 뿌리며 익숙한 반전을 꾀하는, 과장이 심한 홍콩의 도박영화들이나 우리 영화 에서도 짭짤한 재미를 얻을 수 있다.
가만 생각해보면, 그러나 그것은 영화 속의 일이기 때문에 즐거운 듯하다. 실제의 삶에서 그와 같은 도박의 쾌감을 만끽한다는 것은 실로 무모하고 사실상 대단히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일이다. 그러니 사회학쪽에서 사회적 합의의 건강성을 주장하는 것은 매우 소중한 실천이 된다. 지하철을 타는 이유도 어떤 사회적 합의의 실천을 믿기 때문이다.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그리고 예상한 시각에 정확하게 데려다줄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책 제목처럼 ‘신뢰’할 만한 학자는 아니지만 신보수주의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트러스트>에서 나름대로 강조한 대목도 역시 이 점이다. 그 점만으로 볼 때 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이 붕괴되는 우리나라의 신뢰성 수준이 어느 정도일까는 지극히 염려되는 바이지만, 글쎄, <씨네21>의 독자 가운데 혹시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분이 이 대목을 읽는다면 정녕 우리의 신뢰성 수준은 마이너스로 곤두박질치고 있다고 여기지 않을까 싶다. 아이들의 교육문제로 눈을 돌릴 경우, 우리는 그야말로 액면이고 뭐고 히든 카드 한장만 기다리며 판돈을 거덜내는 심정이다.
아이들 문제에 있어서는 <녹색평론> 김종철 선생의 비탄은 실로 거절하기 힘들다. “지금부터 20, 30년 후에 이 세상에 살아남길 바라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우리는 그렇다 치고 우리 아이들이 성장하여 사랑하고 자기 아이들을 가질 때가 되었을 때 조금이라도 망설임이 없을까하는 절박한 심정이다”라는 김종철 선생의 참담한 독백은 비단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의 예외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환경과 생태에 있어 과연 이 아이들에게도 동일한, 그러므로 더 극심해질 상황을 물려줄 것인가 하는 문제도 절실하지만 무엇보다 오늘의 아이들에게 어떤 교육을 시킬 것인가에 대해 현재 대한민국의 학부모들은 ‘올 인’을 각오한 도박심리에 모든 것을 걸고 있다.
무슨 도덕론자처럼 남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나 자신이 그렇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를 지경이다. 고작해야 유치원 보내고 학습지 달랑 한장 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야말로 ‘시작은 미미하였으나 끝은 창대’하게 될 이 주류교육에의 편입에 대하여 나는 몹시 불편하고 불안하다. 유치원에 입학한 뒤 처음 맞는 여름방학, 진작에 형성된 학부모 커뮤니티가 동참을 권유한다. 방학중에 해놓으면 좋다는 전제 아래 영어, 수학, 음악 따위들이 줄을 선다. 크고 작은 방문 학습지회사의 전화도 늘었다. 이 모든 상황이 불편하고 동시에 불안하다.
실로 운명의 우연한 선물이지만 내 사는 아파트 옆동에 짝사랑하는 영화평론가가 이사를 왔다. 그 집에 자주 간다. 그 집 아이 여섯살이고 내 아이 네살 반이다. 내 아이는 한글을 깨쳤고 그 집 아이는 아직 읽을 줄 모른다. 이럴 때, 나는 밤잠을 설친다. ‘벌써’ 한글을 깨치고 중문, 복문을 재잘대는 내 아이를 자랑스러워할 것이냐 아니면 영화평론만큼이나 우직하고 당당하고 ‘그 따위 것’ 가르치지 않은 그 평론가를, 아으, 존경해야 할 거이더냐.
속초에 갔다. 벌써 왔다. 때이른 피서, 보름 전의 행락이었는데, 그곳에는 아내의 친구 부부가 산다. 그들의 행로는 의미심장하다. 탈서울, 탈학교, 탈도시, 탈자본의 기치가 그들의 일상에 엿보인다. 물론 불안하다. 독립운동하듯이 무작정 귀농‘운동’했다가는, 인생 전체를 던지는 지구전에서 패퇴할 것이 염려되므로 차근차근, 한 걸음씩 후퇴해간다는 그들 부부의 모습은 또다른 의미의 도박이다. 양평에서 속초로, 거기서 어성전으로, 그리고 그뒤는 완전히 생태 속에 보금자리를 틀려는 프로젝트에 대하여 나는 논리적 반박을 접고 지지하는 자세를 견지하기로 했다. 그 부부의 도박에 비한다면 학습지 따위나 고민하는 나의 도박은 동네 조무라기의 내기당구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 집에도 애가 있다. 내 아이와 동갑이고 막역하다. 우리 아이는 도시에 있고 그 아이는 빈 들의 농가에 있다. 우리 아이는 친구가 여섯이고 그 아이는 아직 없다. 우리 아이는 도시의 ‘혜택’과 ‘강요’ 덕분에 이것저것 보고 듣고 즐기고 먹고 산다. 그 아이는 부모의 혜택 덕분에 도시의 물성을 닮은 것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곳에서 내 아이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조건과 환경을 보고 듣고 즐기고 먹고 산다. 솔직히 난 어느 쪽이 바른 것인지 모른다. 이 모든 걱정과 근심조차, 그것이 도시의 것이든 귀농의 것이든, 혹시 아주 완강한 형태의 새로운 가족주의가 아니냐는 근원적 회의까지 있다. 남들 다 콩나물 교실에서 고생하며 크는데 내 아이만큼은… 운운.
<허공에의 질주>라는 영화가 있다. 그 영화처럼, 어른들의 도덕적 동기와 선택에 의해 아이가 고독하게 성장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든다. 그것이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는 도박의 정체다. 누군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아이를 방치하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그들 부부와 아이가 우리보다 한결 경쾌한 스텝으로 도박을 벌이고 있다는 점만 다를 뿐인데, 우선, 그 점만으로도 이 대도시는 틀림없이 환멸스럽다.
정윤수/ 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