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작의 계절이 여름이었던 적이 있었다. 네댓해 전부터는 그렇지 않다. <반지의 제왕>과 <해리 포터>가 나란히 찾아오던 겨울부터 계절의 감각이 달라졌다. 세 번째 <해리 포터>가 불쑥 여름에 찾아왔을 때, <반지의 제왕>이 끝나고 <해리 포터>가 쉬었을 때, 그 겨울이 그렇게 춥고 배고프고 심심할 수가 없었다. 올 12월은 든든하고 흐뭇하다. <반지의 제왕>을 마친 피터 잭슨이 ‘필생의 프로젝트’라는 <킹콩> 리메이크를, <슈렉>의 앤드루 애덤슨이 판타지 우화의 고전 <나니아 연대기: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의 실사 버전을,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의 마이크 뉴웰이 어두운 스릴러로 매만진 <해리 포터와 불의 잔>을 나란히 선보일 참이다. 우연찮게도, 모두 원작 소설이나 영화가 있다는 태생부터, 판타지 어드벤처라는 장르의 골격까지 닮아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닮은 점보다 다른 점이 훨씬 많은, 이 겨울 판타지 대작들의 면면을 미리 점쳐보기로 하자.
사랑에 빠진 야수의 귀환킹콩 King Kong
“야수는 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잔인한 손은 얼어붙었고, 그날 이후 그는 얼이 빠진 자처럼 되어버렸다.” 1933년에 만들어진 오리지널 <킹콩>은 막을 열기 전에 아라비아 전설 한 토막을 힌트로 던져준다. ‘미녀와 야수’에 관한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일종의 선언인 셈이다. 당시 <킹콩>은 거대한 고릴라가 갖가지 공룡들을 메치고 엎어뜨리는 경이로운 장면들과 블론드 미인 페이 레이의 관능적인 몸부림과 비명으로 관객몰이에 성공하며 파산 직전의 제작사를 구제하는 위업까지 달성했다. 하지만 딱 한 가지, 그 약속은 지키지 못했더랬다. 미녀에 대한 야수의 사랑, 그 감정을 제대로 전하지 못한 것이다. 그건 당시로선 어쩔 수 없었을 기술력의 문제, 즉 킹콩의 연기력 부재 때문이었다. <킹콩>을 처음 보던 순간 영화감독이 되기로 작정했고, 손수 리메이크할 수 있기를 고대했다는 피터 잭슨이 살려내고자 애쓴 포인트도 그것이다. 미녀와 야수의 애틋하고 오묘한 관계.
1976년 제시카 랭의 데뷔작을 비롯, 수차례 변주 소개되었기 때문에 <킹콩>의 줄거리는 비밀이 될 수가 없다. 2005년 버전 <킹콩> 또한 특별히 과감한 각색을 시도한 것 같지는 않다. 이야기는 야심만만한 영화감독 칼 던햄(잭 블랙)이 영화를 찍기 위해 작가 잭 드리스콜(애드리안 브로디)과 여배우 앤 다로우(나오미 왓츠) 등을 미지의 섬으로 이끌면서 시작된다. 앤은 이 섬의 주민들에 의해 킹콩의 제물로 바쳐지는데, 킹콩은 앤을 해치기는커녕 공룡들과의 위험한 대결을 무릅쓰고 그녀를 지켜낸다. 던햄은 킹콩을 돈벌이에 이용할 목적으로 뉴욕으로 데려오고, 탈출한 킹콩은 앤을 찾아 도시를 헤맨다. 사랑 때문에 낯선 곳에서 죽음을 맞는 킹콩의 마지막 모습에는 “눈물을 참기 힘들다”고 제작진은 장담한다. 그게 바로 피터 잭슨이 이 영화를 만든 이유라면서.
<반지의 제왕> 3부작으로 17개의 오스카 트로피와 30억달러의 수익을 올린 피터 잭슨은 <킹콩>을 만들던 무렵 무려 12kg의 살을 빼고 안경도 벗었다. 마음을 비우고 어깨를 가벼이 하겠다는 제스처로도 보이지만, 피터 잭슨의 이런 급작스런 변화에는 ‘필생의 프로젝트’에 임하는 이의 비장한 각오 같은 것이 비치기도 한다. 1997년 촬영 준비 단계까지 이르렀던 그의 <킹콩>은 흥행을 비관하던 유니버설에 의해 내쳐졌고, <반지의 제왕> 이후 실수를 통감한 스튜디오 간부들의 설득으로 되돌려진 바 있다. 전화위복인 것은 그새 특수효과 기술이 급격하게 발전했고, ‘<인디아나 존스> 스타일’의 초기 시나리오를 전면 수정할 수 있었다는 사실. <킹콩>에 전수된 <반지의 제왕>의 노하우가 한두 가지는 아니지만, 가장 기대되는 지점은 디지털 캐릭터 골룸의 표정과 몸짓과 목소리를 주었던 앤디 서키스가 전과 같은 방법(모션캡처와 CGI 캐릭터)으로 킹콩에 영혼을 불어넣었다는 사실이다.
킹콩을 비롯한 라이벌 괴물들, 신비로운 밀림 등의 배경 세트와 수십종의 미니어처들을 만들어낸 것은 피터 잭슨의 ‘좋은 친구들’ 웨타 스튜디오. 이들 작업의 하이라이트는 7.6m짜리 킹콩이 티라노사우루스와 격투를 벌이는 장면과 킹콩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떨어지는 최후의 장면. 원작의 페이 레이나 제시카 랭에 비해 섹시하지는 않지만, 한결 차분하고 모던한 느낌을 주는 나오미 왓츠, 심약한 예술가이자 로맨틱한 연인으로 등장하는 애드리안 브로디, 피터 잭슨의 분신이라는 소문을 달고 다니는 무모한 영화감독 역의 잭 블랙이 어떤 앙상블을 보일지도 궁금해진다.
“원작에서 무엇을 더 개선했고 발전시켰다고 말하는 건 적절치 않다. 그건 클래식이고, 이건 리메이크다. 현대 테크놀로지가 있으니 시도해볼 만하다는 것이다. 극사실적인 고릴라를 만들 수 있으니까. 평생 <반지의 제왕>을 능가하는 작품을 만들어내느라 끙끙대는 건 비현실적이고 비생산적인 일이다. 오히려 완벽한 오락물 한편을 선보이는 게 훨씬 나을 거라 생각한다. 내가 바라는 건, 아홉살짜리 아이들이 이 영화를 계기로 십수년 뒤에 자기 영화를 만들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피터 잭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