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은 그 지명도에 비해 영화로 접할 기회는 흔치 않은 작품이다. 마이클 브룩에 따르면 영어권에서 극장용 유성영화로 제작된 <베니스의 상인>은 놀랍게도 이번에 개봉되는 마이클 레드퍼드 작품이 최초이다. 이탈리아와 프랑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고향인 영국에서 제작된 몇편의 무성영화가 있었지만, 유성영화 시대에 들어선 뒤로 로렌스 올리비에가 샤일록을 맡아 열연한 연극 등이 TV용 영화로 각색된 일을 제외하고는 순수하게 극장의 관객을 대상으로 제작된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이 작품의 실질적 주인공이자 전형적인 반영웅(antihero)인 샤일록이라는 캐릭터가 갖는 미묘한 정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시대에 반유대주의(anti-Semitism)는 동시대 연극 관람객인 귀족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적합한 소재였다. 젊은 귀족들은 방탕한 생활을 하느라 엄청난 부채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들이 소비하는 돈은 합법적인 상업 활동에 엄청난 제약을 받고 있었던 유대인 고리대금업자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그들은 젊은 귀족 베사니오에게 심정적으로 동화되면서 샤일록의 파멸에 조소를 보내며 통쾌한 승리감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관객이 공감을 보내며 박수갈채를 보냈던 바로 그 요소가 이 작품의 발목을 잡는 요인이 되었다. 샤일록을 통해 발현되는 반유대주의가 현대의 ‘정치적 올바름’(politically correct)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첫머리부터 마이클 레드퍼드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해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게 드러난다. 이 영화에서 원작의 첫 대사가 등장하기까지 6분여간의 오프닝 시퀀스는 완전하게 감독의 창작품이다. 레드퍼드는 ‘Venice 1596’이라는 자막을 통해 이 영화의 역사적 시공간을 명시하고, 당시 유대인들이 겪었던- 그러나 현대의 관객이 잘 알지 못하는- 경제적 인종적 차별을 자막을 통해 전달한다. 그리고 자막을 담아내는 화면 속에 안토니오가 샤일록에게 침을 뱉는 장면을 삽입함으로써 샤일록이 부채의 대가로 요구하는 안토니오의 살 일파운드가 샤일록의 잔인한 취미나 고약한 성미 때문이 아니라 그가 오랜 세월 느꼈던 모멸감의 표현임을 명시한다.
원작 <베니스의 상인>에는 젊은 연인들을 축으로 하는 희극적 요소와 안토니오와 샤일록을 축으로 하는 비극적 요소가 교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하지만 감독인 레드퍼드는 연극으로 공연하면 4시간여가 걸린다는 이 작품을 두 시간 남짓한 러닝타임 속에 압축하면서 희극적 요소들을 과감하게 삭제하고 비극적인 분위기를 강화시켰다. 그는 샤일록의 내면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옹호한다. 알 파치노의 격정적인 연기를 통해 되살아난 샤일록은 이 작품 속의 어느 인물보다도 강력한 매력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리하여 다른 작품에서는 때때로 지나치게 격정적이어서 부담스러웠던 그의 연기 스타일이 이 작품에서는 인물의 적합한 외피를 찾아 입은 것처럼 보인다.
이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관계는 안토니오와 베사니오의 관계이다. 그 둘은 우정과 사랑 사이를 넘나드는 모호한 경계에 있다. 안토니오의 음울한 대사와 베사니오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와 애정이 제레미 아이언스의 목소리와 눈빛을 통해 형상화될 때, 거기서는 남성간의 우정을 넘어선 미묘한 감정들이 감지되며, 그들의 키스는 의례적인 인사의 의미로 읽히지 않는다. 이 영화가 처음 미국에서 개봉되었을 때 두 인물의 관계를 동성애적으로 해석한 것이 아닌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여기에 재판관으로 변장한 포셔가 두 남자의 애정어린 시선을 다소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장면과 자신과 베사니오의 사랑에 안토니오를 증인으로 삼고자 하는 종반부의 시퀀스들이 더해지면서 그와 같은 해석은 좀더 신빙성을 갖게 된다. 모든 연인들이 사랑을 나누기 위해 각자의 침실로 사라진 뒤 홀로 남은 안토니오의 쓸쓸한 뒷모습은 연인들의 공간인 벨몬트에서 이질적인 그의 존재감을 잘 보여준다.
마이클 레드퍼드는 셰익스피어의 시적인 대사들을 최대한 원작 그대로 살려내면서도 물위의 도시 베니스와 상상의 공간 벨몬트 그리고 유대인 거주 지역 게토에 인물들간의 관계를 재배치하고 그들의 내면을 조망하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색채를 찾아낸다. 이와 같은 작업은 촬영감독 브누아 델롬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샤일록과 안토니오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이 이 작품의 드라마적인 재미를 담당하고 있다면 마치 르네상스 시대의 화첩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화면 구성이 이 작품의 시각적 쾌감을 극대화하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현대의 모든 예술 장르에 끊임없이 소환되는 것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영국인들의 세계관이 압축적으로 담겨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공을 초월한 시대정신을 담아낼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텍스트이기 때문일 것이다. <베니스의 상인>은 레드퍼드를 통해 새로운 외관을 갖게 되면서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며 향유자와 대화하는 텍스트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레드퍼드의 연출과 각색으로 현대성을 되찾고, 브누아 델름에 의해 시각적으로 풍성해진 이 작품은 우리에게 ‘텍스트의 즐거움’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