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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신파냐 쿨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혹시 나한테만 유독 크게 들려오는 환청과 환시가 아닐까 싶었다. 시작은 <너는 내 운명>이었다. 이 ‘통속사랑극’이 나에게는 경고 메시지처럼 보였다. ‘쿨한 스타일을 좇으며 인생을 낭비한 죄의 대가를 언제가 받으리라’는. “쿨한 세태를 직속구로 타격한다. 이래저래 쓰리다”라고 20자평을 쓴 것도, 반박할 수 없는 실화를 근거로 영화를 만든 음모가 어디에 있느냐고 감독 인터뷰에서 따져 물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인터뷰를 넘기고 늦은 여름 휴가를 일본 홋카이도로 나 홀로 떠났다. 삿포로 첫날밤, 홋카이도신문사의 문화센터를 찾았다. 유일하게 의지할 일본인 친구가 한국어 강의를 하고 있던 터였다. 그 친구는 강의의 절반을 나에게 할애하는 친절을 베풀었다. 여기 한국에서 영화기자로 일하는 친구가 왔으니 한국어로 궁금한 건 뭐든지 물어보고 들어보라는, 살아 있는 강의 부교재가 됐다. 서툰 한국어와 유창한 한국어가 열띠게 오간 끝에 잔류 희망자와 더불어 주말 심야 음주를 시작했다.

다카시마 시호. 24살의 귀여운 이 여성은 치과에서 일한다고 했다. <클래식>을 보고 한국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발리에서 생긴 일>을 보고 조인성의 열렬한 팬이 됐다. 일본인 친구의 동시통역에 힘입어 쉼없이 대화가 이어지는데 ‘헉’ 소리나게 만드는 질문이 나왔다. “한국에 가면 <클래식> 같은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촉촉한 눈빛에 잠시 할 말을 잊었다가 되물었다. “아니, 여기 일본 남자들도 얼마나 훌륭한데, 왜 그러셔요?” “그들은 아무 생각 없어요. 연애를 해도 서로의 전망이 전혀 없어요. 양다리 같은 거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적어도 내 주변은 다 그래요.”

이시오카 마사코. 대학생을 자녀로 두고 멋진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는 이 중년 여성은 은행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한다고 했다. 술집에 앉자마자 대뜸 한국식 인사를 한국말로 건네왔다. “나이는 얼마인가요? 결혼은 하고 있나요?” <겨울연가>와 욘사마의 열렬한 팬이라 <외출>을 적어도 세번은 보겠다는 그는 세심한 질문을 쏟아냈다. “한가운데 마당이 있는 집이 진짜로 많나요? 장롱 위에 이불 같은 짐을 올려놓는 게 지금도 일반적인가요?”

밤이 깊어갈수록 두 세대의 심정이 분명하게 전해졌다. 겸손을 동반한 애절한 사랑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밀어붙이는 남자를, 마당과 장롱에서 피어오르던 따뜻한 순정을 찾고 있었다. 일본의 쿨한 개인주의와 대척점에 있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이랄까. 몇 시간 전 강의시간에 초롱초롱한 수많은 눈빛이 “한국 남자는 어떤가요?”라며 엄청난 걸 묻기에 “저희들끼리 농담처럼 그래요. 한국 남자가 세계로 나가면 가장 경쟁력 없다”고 주관적으로 답했더니 함성처럼 들려오던 반응이 새삼 떠올랐다. “에에?”(그럴 리가, 말도 안 된다는 그 눈빛들) 마사코와 시호에게 물었다. “한국영화나 드라마가 서로에게 무심한 쿨한 풍경을 주로 담게 된다면 그래도 계속 볼 건가요?” “에에?”라는 예의 그 감탄사를 일시에 내뱉으며 미간이 동시에 찡그려졌다. “그럼 싫죠.”

묘한 기분이 됐다. 순정 호수에 익사할 뻔하다가 쿨한 얼음을 제조하며 사는 법에 익숙해지고 있는 터에 어찌 환청의 공세가 바다 건너에서까지 이어지냔 말이냐…. 쿨의 헤게모니가 남한을 지배하는 날, 다시 이들처럼 판타지 같은 순정을 그리워하게 될 거란 말이냐….

환청을 진정시켜준 건 <사랑니>였다. <발리에서 생긴 일>의 조인성이 물론 사랑스럽고 좋지만, <사랑니>의 김영재가 더 좋았다. 동거녀가 띠동갑 아래의 남자를 생각하며 ‘자고 싶다’고 해도 그 욕망을 인정할 줄 아는 용기. <너는 내 운명>의 전도연이 물론 예쁘기 그지없지만, 불륜을 무화하는 <사랑니>의 김정은이 더 좋았다. 인영(김정은)과 정우(김영재)의 동거가 예까지 오는데 겪었을 곡절과 순정이 비록 드러나지 않지만 나는 이들의 감춰진 속내가 더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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