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민영방송 ‘프로지벤(Pro7)’이 엄청난 돈을 쏟아부은 TV영화가 하필 시점과 주제를 잘못 정하는 바람에 쪽박을 찰 뻔하다가, 결국 대박을 낳았다. 문제의 작품은 지난 9월29일 황금시간에 전파를 탄 <쓰나미>. 지난해 12월, 빈프리트 욀즈너가 감독한 북해 버전 <쓰나미>는 10월 초 촬영을 마친 뒤, 올해 초 봄으로 예정된 방영시기에 맞춰 느긋하게 후반작업 중이었다. 그 와중에 동남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수십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쓰나미 재해가 발생했다.
지구상의 모든 이들을 엄청난 충격에 몰아넣은 이 참사로 이제는 쓰나미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가 되었지만, 정작 이보다 앞서 ‘쓰나미’ 프로젝트를 완성시킨 감독과 방송사의 입장은 이만저만 난처한 것이 아니었다. 참사 뒤 <완벽한 파도>라는 제목의 대중가요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비치> 등의 방송이 중단된 상황에서 <쓰나미>라는 제목을 가진 영화를 방영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봄으로 예정되었던 방영일은 피해자 유가족들을 배려한다는 이유로 무기한 연기됐다.
그러나 재해 발생 뒤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방송사의 배려는 그 시효가 다 된 모양이다. 쓰나미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조차 힘들다는 유가족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프로지벤’은 9월 말 방영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방송사는 이 작품이 73개국에 판매되었고, 그중에는 피해가 극심했던 인도네시아와 스리랑카도 들어 있을 뿐 아니라, 이미 전파를 탄 스페인에서는 시청률 26%라는 뜨거운 반향을 일으켰다고 항변했다.
방영 뒤 ‘TV무비’가 실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독일 시청자의 56%가 <쓰나미> 방송을 문제삼지 않는다고 답했으나, 40%는 유가족들의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참사를 상기시키는 영화방송이 너무 잔인한 처사라는 입장을 보였다. 언론 역시 쓰나미 피해자 유가족들이 이 영화를 보고 느낄 분노와 슬픔에 대해 공감하면서도, 그렇다고 방송금지처분을 내릴 경우 창작의 폭이 좁아지고, 스펙터클영화의 주제 역시 상당부분 제한될 것이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인권존중, 피해자에 대한 배려도 결국은 시간이 문제. 아무리 끔찍한 현실의 참사라도 시간이 지나면 신화가 되어버리는 것이 픽션의 세계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