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상 쇼윈도를 들여다보던 남자, 매튜(조시 하트넷). 주인이 권해주는 화려한 반지들 앞에서 다만 망설일 뿐, 결국 반지를 사지 못한다. 그의 부유하고 아름다운 약혼녀는 그의 장래까지 보장해줄 사람이지만 어쩐지 그는 확신이 없어 보인다.
카페 공중전화 부스에서 새어나오는 낯익은 음성에, 이 남자는 탄식에 가까운 이름 하나를 뱉어놓는다. “리사!” 2년 전 연락도 없이 갑자기 사라져버린 사랑의 환영. 심히 불안해 보이는 그는 더욱 불안한 표정이 되어 그 환영을 쫓아간다. 그녀는 사라지고, 공중전화 부스에는 호텔 키가 남아 있다.
약혼녀의 배웅을 받으며 예정된 출장길에 오른 그는, 비행기를 타려다 말고 몰래 빠져나와 리사(다이앤 크루거)의 흔적을 쫓기 시작한다. 결국 찾아낸 그녀의 아파트는 2년 전과 똑같은 향기와 낯익은 물건들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선 ‘리사’(로즈 번)는 이름만 같을 뿐, 2년 전의 리사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1996년 뱅상 카셀, 모니카 벨루치, 로만느 보링거 주연의 프랑스영화 <라 빠르망>의 할리우드판 리메이크작이다. 리메이크작이 잘난 아버지를 둔 아들이라 할 때, 야심있는 아들이라면 자신 안의 아비를 살해하고 (잘되든 못 되든) 제 색깔로 다시 칠해보려는 욕심을 품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 아들은 아비 살해는커녕 잘난 아비의 덕만 보려 한다. 결말을 할리우드식으로 바꾼 것을 제외하면 <라 빠르망>의 한신 한신을 그대로 옮겨붙인 듯 따라다니지만, 캐릭터와 감수성은 허망해졌으니 가슴 아프다. 다이앤 크루거의 조각 같은 외모는 ‘보기에는 참 좋았더라’이나, 시종일관 한결같은 조시 하트넷의 불안한 얼굴은 한숨을 내쉬게 한다(퉁퉁 부은 눈과 코 훌쩍이는 소리도 자꾸 반복되면 더이상 ‘우수’로 보이지 않는다).
원작을 보지 않은 이들에게는 (결말도 해피엔딩이고 하니) 가을에 보기 좋은 러브 스토리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알렉스(로즈 번)라는 캐릭터가 문제다. 로즈 번은 로만느 보링거가 갖고 있던 매력을 잃고, ‘열등감과 이기심에 휩싸인 난처한 여자’가 되어버렸고, 지루하게 반복되는 그녀의 ‘못된 행각’은 극을 퉁명스럽게 만든다. 포스트 록(그리고 몇개의 모던 록)으로 채워진 O.S.T만은 훌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