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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서머 가이, 홍명보, 축구협회

미국 프로야구팀 보스턴 레드삭스의 열혈팬을 주인공으로 삼은 로맨틱코미디 <날 미치게 하는 남자>를 보다가 재미있는 표현 하나가 귀에 들어왔다. ‘윈터 가이, 서머 가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영화의 주인공 벤은 야구시즌이 아닌 겨울에 한없이 다정하고 친절한 남자인데 야구시즌이 달아오르는 여름만 되면 야구에 미쳐 정신을 못 차린다. 벤의 애인은 그에게 윈터 가이는 오케이지만, 서머 가이는 감당 못하겠다고 말한다. 야구장에 가야 하기 때문에 주말에 파리로 여행가자는 애인의 제안을 마다하는 남자를 어느 여자가 좋아할까. 영화는 끝내 해피엔딩을 이끌어내지만 현실도 그럴지는 의심스럽다. 아마 이 해피엔딩은 보스턴 레드삭스의 월드시리즈 우승처럼 86년 만에 찾아오는 기적일지도 모른다.

애인 입장이라면 윈터 가이가 더 좋은 게 당연하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윈터 가이보다 서머 가이에 끌렸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아낌없이 모든 걸 바치는 열정, 차라리 광기라고 불러야 할 그런 집착이 부러웠다. 무엇인가 미칠 만한 것이 있는 사람과 모든 걸 남과 비슷하게 적당히 하는 사람, 둘 가운데 전자의 삶이 더 풍요로워 보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윈터 가이와 서머 가이가 적당히 조화를 이루며 굴러가는 것이지만 모든 윈터 가이들의 가슴에도 한번쯤 서머 가이가 되고 싶다는 소망이 숨어 있으리라.

홍명보 축구 국가대표팀 코치

TV에서 새로 축구 국가대표팀 코치가 된 홍명보가 인터뷰하는 모습을 봤다. 그는 코치직을 수락하며 2006년 월드컵 결과가 나빠 자신이 쌓아온 명예가 다 무너진다 해도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그의 눈빛과 표정에서 오직 축구를 위해 모든 걸 바치겠다는 변하지 않는 열정이 느껴졌다. 지난 월드컵에서 마지막 승부차기 골을 넣고 환호하던 표정처럼 이번에 그가 기자회견에 보인 얼굴엔 한치 거짓도 끼어들 틈이 없어 보였다. 나는 이것이 서머 가이만이 보여줄 수 있는 표정이라고 생각한다.

TV에서 <PD수첩>을 봤다. 대한축구협회의 실상이 폭로된 지난 9월27일 <PD수첩>은 축구팬 입장에선 엄청난 충격이었다. 보도에 따르면 협회는 한마디로 정몽준 회장의 사조직이었다. 그에게 반기를 든 사람들은 쫓겨났고 호랑이 엠블럼은 정몽준 개인의 것이었으며 협회 운영비의 상당 부분은 기자들 골프 접대에 쓰였다. 같은 날 있었던 국정감사에선 협회의 회계에 적지 않은 의혹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다음날 신문을 봤다. 협회를 비판하는 기사가 엄청나게 쏟아질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그런 기사는 없었다. 심층취재를 하려는가 싶어 그 다음날 신문을 봤다. 마찬가지였다. 주요 언론 가운데 어디서도 <PD수첩>이 제기한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다. 박찬호의 불펜행이나 박지성의 결장은 1면 뉴스감이지만 협회를 공격하는 기사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국가대표팀 경기만 하면 난리블루스를 추던 그들이 설마 이번 사안이 기삿거리가 안 된다고 생각했단 말인가.

나는 협회를 축구에 미친 서머 가이들에게 돌려주길 소망한다. 지금껏 협회는 축구가 아니라 정치 혹은 돈에 관심있는 자들의 것이었다. 축구 관련 기사도 서머 가이들에게 돌려주길 소망한다. 지금껏 그것 역시 글 혹은 축구에 대한 열정을 골프장에 팔아버린 자들의 것이었다. 아마 이런 일이 축구계에만 한정된 것도 아니리라(부천영화제가 어떻게 훼손됐는지 돌이켜보라). 나는 돈 욕심, 정치 욕심, 명예 욕심 없는 서머 가이들이 사랑스러운 만큼 그들이 엉뚱한 사람들한테 우롱당하는 세상이 못내 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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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대한축구협회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