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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니>, 정지우의 도약 [4] - 김정은 인터뷰
사진 이혜정김혜리 2005-10-04

<사랑니>의 친절한 인영씨, 김정은을 만나다

“그저 가만히, 카메라 앞에서 견디는 것을 알게 됐다”

<사랑니>의 김정은은, 다른 여자다. 키가 늘씬하고 눈동자는 차고 잔잔하며 동작은 나긋하다. 그리고 <사랑니>의 조인영은 ‘캔디’가 아니라 공주다. 세상은 결국 자기를 중심으로 공전한다고 믿는 진짜 공주. <재밌는 영화> <가문의 영광> 등 김정은을 스크린에 안착시킨 ‘센’ 연기와 <사랑니>의 조용한 모험 사이에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그건 그녀의 연기에 두려움이 없다는 사실 정도일 것이다. 정지우 감독은 그녀에게 “강을 건넜다”고 말했다. 김정은도 그 표현이 마음에 드는 눈치다. 기슭에서 망설이던 배우는 이제, 사라졌다. <사랑니>는 확실히 이 배우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듯하다. 김정은은 지난 9월9일 출연 중인 드라마의 작업 방식을 견딜 수 없다는 글을 팬 카페에 올려 파문을 일으켰다. “진심없이 이해없이 연기하는 건 배우로서 죽기보다 끔찍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라고 그녀는 비장하게 썼다. 가까스로 시간을 낸 김정은을 만났다. <루루공주> 소동 탓에 과민하거나 침울할까 우려했는데 새 구두를 신고 외출한 아가씨처럼 활기찼다. 인영으로 살고나니 성격도 변한 모양이라고 그녀가 웃었다. 지금 김정은이 겁내는 것은 오직 하나, 본인의 기존 이미지로 인해 <사랑니>가 목표한 매력적인 여인의 초상이 흐려지고 너무 ‘친절한 인영씨’가 된 게 아닐까 하는 근심뿐이다. 강을 건너온 그녀의 사연을 통해 정지우 감독의 연기연출법도 엿들을 수 있었다.

-<사랑니>를 선택할 즈음, 배우로서 당신의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이었나.

=그때가 <파리의 연인>을 끝낸 가을이었다. 여기저기서 상 받고 축하받는 신드롬의 한복판이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이, 카메라 앞에서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연기하는 내가 그것으로 영광받는 자리에만 가면 “아직 제 몫이 아니고, 많이 부족해요”라고 겸손을 부렸다. 어떤 사람은 그런 나를 착하다고 봐줬지만 “너 왜 그래?”라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곰곰 돌아보면, 내 자신만 아는 실망과 불만이 있었던 거다. 당시 시나리오가 이만큼 (두뼘쯤 손을 들며) 쌓였는데, 대부분 내가 어떤 연기를 할지 뻔한 작품들이었다. 그런데 <사랑니>는 한눈에 뭐가 뭔지 명료하지가 않았다. 이게 뭘까. 그래서 보통은 책상에서 시나리오를 읽는데, <사랑니>는 침대로 들고 갔다. 결국 세 번째 읽어보던 날 새벽 4시에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어 감독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만난 감독님은 말했다. 인기의 정점에 서 있는데도 내가 어딘지 불안해 보인다고.

-영화 <나비>를 할 때 “시나리오 내게 준 것 맞나?”라고 물었다고 들었다. <사랑니> 역시 그런 문답을 하지 않았나.

=감독님이 요구한 숙제를 하는 동안, 그런 대화가 있었다. 감독님은 내가 과장된 코미디 연기를 하는데, 묘하게 그것이 진심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렇게 시작해서 점점 감독님에 대한 믿음이 깊어졌다.

“진짜 연기를 하는 배우의 흉내라도 내보고 싶었다”

-솔직히 지금까지 어떤 영화보다 연기가 돋보이고 심지어 인상도 달라 보인다. 감독이 요구한 숙제가 그 변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었을 텐데.

=‘진짜’ 연기를 하는 배우의 흉내라도 내보고 싶다는 갈망이 있었다. 처음부터 감독님과 친해져야지 하고 결심했다. 같이 술도 마시고, 7, 8년 전 신인 시절에나 했던 리딩도 했다. 감독님을 앞에 두고 혼자 연기하기도 했다. 무안했지만 즐거웠다. 어느 날은 감독님이 <내 남자의 로맨스> 대사를 발췌해 오셨는데, 내 역(현주)이 아니라 은다영(현주의 애인을 빼앗으려는 여배우)의 대사였다. “대체 왜 이런 걸?”하는 기분으로 방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는 “아아 이래서!”라며 나왔다. 답을 미리 내놓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방향을 잡도록 톡톡 건드려주는 느낌이었다. 하루는 느닷없이 초록 칠판이 집으로 배달됐다. 학원 강사라면 시선은 학생한테 두고 뒤로 손을 뻗어 능숙하게 분필을 쓰도록 연습하라는 뜻이었다. 거실 콘솔 위에 두고 분필가루 날린다는 엄마 잔소리를 감수하며 판서 연습을 했다. 책방에 가서 <수학II 정석>도 사서 공부했다. 한번은 이석이 사는 아파트로 뛰어올라가는 도입부 장면 촬영 때 신을 준비하는 동안 감독님이 <2046> O.S.T를 MP3로 계속 들려주셨다. 살수차에서 비가 쏟아지는 중에 그 음악을 듣자니 정말 심장이 둥둥거렸다. 그 장면의 표정은 몸이 느낀 결과다.

-제스처가 큰 과거 연기와 <사랑니>의 미세한 연기가 가져다주는 긴장을 비교한다면.

=비교도 안 될 만큼 <사랑니> 연기의 긴장이 컸다. 초반부 학원장면에서 이석을 처음 만난 인영의 마음은, 파장으로 치자면 과거에 내가 온몸을 던진 연기에 맞먹었는데 미동없이 현실적으로 표현해야 하니 힘들었다. 그런데 감독님은 처음부터 “미동없이 하세요”라고 주문한 것이 아니라, 미칠 듯한 감정의 파도가 표정에 다 드러나도록 NG 컷에서 일단 에너지를 다 끌어냈다. 필름 엄청 썼다. 그리고는 “이제 점점 얼굴을 줄이세요. 기분만 느끼면서”라고 조절해갔다. 우리끼리는 ‘말풍선’이라고 부르는데, 아무 말도 안 하지만 내면으로는 대사가 있는 상태다. 그래서 현장에서는 “방금 속으로 뭐라 그랬어?” 하는 소곤거림이 감독님과 오갔다.

-전작과 달리 애드리브가 거의 없어 보인다.

=석이를 집에 초대한 신에서 나와 태성(이석 역)이 문간부터 꼭 끌어안고 달라붙은 채 이 방 저 방 오가는데 그냥 사이좋게 대화하는 신으로는 미흡하다 여긴 감독님이 내놓은 유쾌한 해결책이었다. 그 즈음은 막바지라 감독님의 아이디어를 5만% 믿고 “이번에는 뭘 던져주실까” 턱 괴고 기다리는 태세였다. 그렇게 현장에 매일 가고 싶어 안달을 내는 기분은 처음이었다. 이제 “에이, 우리 선수잖아. 그냥 알아서 해” 하는 마음가짐으로 좋은 결과를 창출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전작을 통틀어 당신을 이렇게 거리를 두고, 공간 안에서 찍은 영화가 없다. 카메라와의 거리가 주는 느낌이 달랐을 거 같다.

=카메라가 멀어지니까 무심할 수 있었다. 가까이 들어가면 ‘옛날 버릇’이 나온다고 감독님이 그랬다. “가만히 있어봐. 아무것도 안 해도 돼”라고 말씀하셨다. 말하자면 이런 거다. 카메라가 다가오면 “아이고, 이렇게 가까이 와주시고 타이트하게 잡아주시는데 카메라께 뭔가 해드려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든다. (좌중 폭소) <사랑니> 이후로는 얼굴을 많이 움직이지 않아도 뭔가 연기를 덜했다는 느낌이 안 든다. 그저 가만히, 카메라 앞에서 견디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고나니 늘 관객에게 서비스하려고 애쓰는 배우를 보는 관객의 ‘불편함‘이 어떤 것인지도 어렴풋이 알겠더라.

“팬 카페에 글 올릴 때는 ‘유서’쓰는 심정이었다”

-최근 <루루공주>에 대해 “더이상 진심으로 연기하기 힘들다”고 선언한 일도 <사랑니>의 경험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사랑니>는 내가 참을 수 없는 것과 있는 것의 경계를 바꾸어놓았다. 내 안에서도 나름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사랑니>가 없었다면 이 정도로 고통스러웠을지는 모르겠다. 무리한 제작일정이나 피로 때문이 아니다. 몸이 힘든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 TV냐 영화냐의 문제도 아니고, 멜로냐 코미디냐의 문제도 아니다. 어제 사랑 때문에 가족을 버렸던 여자가 이튿날 코미디를 하는 상황은 배우로서 작업하기 힘겨웠다. 코미디도 바탕에는 일관성 있는 토대가 있어야 한다. 팬 카페에 글을 올릴 때는 ‘유서’쓰는 심정이었다. 게다가 글 올릴 때 마침 천둥까지 치더라. (웃음) <사랑니> 대사를 빌리자면 “그 새벽에 천둥 친 거 알아? 잠자는 사람들은 그걸 몰라”였다. 물론 백번 생각해도 안이하게 결정한 내 탓이고 자업자득이다. 다만 나를 지지해주는 팬들에게 뭔가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았다. 일단 글을 올리고 나서 매니저에게 “정말 미안하다”고 전화했더니 “입원할까?” 그러더라. (웃음) 그래서, 난 잘못한 게 없으니까 입원은 싫다, 피하지 않겠다고 했다.

-캐릭터마다 육체적 감각이 다를 것이다. 러닝머신 위에서 달리고 목 에센스를 열심히 바르는 서른살 인영을 연기하는 몸의 감각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목에 화장품 바르는 건 내 생각인데 “전 서른살이고 요새 이런 짓을 해요” 했더니 감독님이 너무 재미있다고 마구 발라달라고 하더라. (웃음) 종일 분필을 쥐고 있던 날도 있었다. 사랑니가 돋아 아파하는 신에서는, 진짜 이를 닦고 손에 물을 묻힌 다음 치약의 상큼한 느낌을 머금고 연기했다. 나는 사실 키가 꽤 큰데 그동안 화면에서는 늘 작아보였다. 왜일까? 나는 스스로 그것이 나의 가장 큰 문제이며, 캐릭터의 문제라고 생각해왔다. 감독님은 나의 기다란 느낌과 야리야리한 이미지를 살리고 싶어했다. 그래서 하이힐도 많이 신었고, 헐렁해도 선이 살아나는 옷을 입었다. 한편 감독님은 정우와 동거하는 집 장면 촬영날에는 화장도 말고 머리도 종일 빗질하지 않은 채 하나로 묶으라고 했다. 집에 들어와 비로소 긴장을 푸는 직장 여성들이 그러듯이. 뭐든 진심으로 제대로 해내려니까 힘들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여러 번 겪은 키스신도 이번에는 와인 몇잔을 마시고 해냈다. 자동 모드로 하는 연기를 너무나 잘해 온 아이가, 우습게도 순수한 백지로 돌아가려니 용기내기 힘들더라.

-인영은 열일곱살 애인과 보통 커플이 하는 모든 사랑의 행위를 다 하려는 서른살 여자다. 즉, 그녀의 선택에 대해 관객이 혹은 배우 자신이 의구심을 품을 수도 있는 캐릭터다. 거리낌은 없었나.

=없었다. 덜 친절해지기, 설명하려들지 않기, 공감을 얻어야 한다는 강박 버리기. 그것이 시작이었으니까.

-극중 인영처럼 사랑니나 맹장염을 앓은 적 있나.

=맹장은 아직 갖고 있다. 사랑니는 신기하게도 영화 찍으면서 정말 앓았다. 극중에서는 윗니가 아프지만, 실제로는 아랫니가 아팠다. 지금은 괜찮은데 개봉하면 또 나려나.

“서른 같고 가을 같다, 행복하면서도 시니컬한”

-서른살 석이와 동거하는 친구 정우, 열일곱 이석이 한자리에 모이는 클라이맥스를 연기할 때 당신의 감정이 궁금하다.

=그 기분이 현재 내 감각과 비슷할 것 같다. 요즘 내가 서른 같고 가을 같다. 아주 행복하면서도 조금 시니컬한. 어린 시절부터 힘들 때면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읽는다. 무척 슬픈 책인데 묘하게 자꾸 보면 그리 슬프지도 않다. 책 속에서 하녀 로잘리가 “인생은 그렇게 쉽지도 어렵지도 않은 것 같아”라고 말하는데 그 느낌이 석이를 다시 만나기 전 인영의 상태였을 것 같다. 그리고 엔딩의 느낌이 또 시작과 비슷하다. 사랑은 사는 게 그처럼 심드렁하다가도 누가 나타나면 뒤집어지게 설레고 그래도 몸을 던질 수밖에 없는 감정인 것 같다.

-<사랑니>로 연기의 다른 영역을 경험했고 <루루공주>의 소동도 있었다. 다음 행보가 신중하겠다.

=만약 내가 확실히 <사랑니>로 채워지고 변화했다면, 예전 같은 불안감 속에서 급급하게 선택하지 않을 수 있겠지. 여행도 하고 다시 피아노도 치고 배우고 싶었던 것 배우면서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내게 책임이 있다면 좋은 작품을 고르는 책임일 거다. 정지우 감독님이 새 영화 찍으면 같이 하고 싶다고 조르긴 했다. 이번에는 꼭 남자 이야기를 하겠다고 하셔서 우겼다. 어쨌든 여자가 나오긴 할 거 아니냐고.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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